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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지나치게 재산을 축적하여 그의 집 앞은 시장과 같았다'고 한다. 뒤에 손자들 [[이충]]과 [[이명]]의 영귀로 복권되어 [[증직|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용사일기》(龍蛇日記), 《문수지》(文殊志), 《사성강목》(四姓綱目) 등을 남겼으나 사림이 지배하는 조선에서는 복권되지 않았고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저서들은 [[1945년]] 광복 이후에 후손들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현 [[고양시]] 원당구 원당동) 왕릉골 선영하에 안장되었다. [[신도비]]문은 그의 스승이기도 한 [[정사룡]]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