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61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Disambigbot - 오라녜 공작; 예쁘게 바꿈
Yjs5497 bot (토론 | 기여)
잔글 맞춤법 교정. 사용자:yjs5497_bot의 맞춤법 교정목록을 참조하세요 using AWB
64번째 줄:
프랑스군은 메르시를 전사시키고, [[1645년]] 8월 3일 [[뇌르틀링겐 전투 (1645년)|뇌르틀링겐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바이에른군을 물리쳤다.
 
병치레가 심한 앙기앵 공작은 그 후 곧 프랑스군 사령관에 튀렌을 임명하고 자신은 전선에서 물러났다. 다시 대규모 군대를 모은 황제군에 대해 쐐기를 박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은 튀렌이 [[토리아]] 공략에 이르러 전승이란 빛나는 전공을 얻는것으로얻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1646년]] 그는 결국 결정적인 전승을 얻었고, 이것으로 바이에른군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떨어져 나가는것으로나가는 것으로 인해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바이에른 선제후)|막시밀리안 1세]]는 화평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서명한것은 1647년 3월 14일). [[1647년]] 튀렌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약체화된 군대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으나, 튀렌은 플랑드르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군을 굴복시킬 기회를 놓친것 뿐만 아니라 몇 개월 동안 급료를 받지 못한 바이마르군 사이에서 심각한 반항이 일어났다. 튀렌은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여 불만을 품은 연대를 처리하고 약간의 유혈 사건이 있었지만, 바이마르 군을 복구하고 사건을 종결시켰다.
72번째 줄:
튀렌은 곧이어 [[룩센부르크]]로 진군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라인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1648년]] 바이에른이 다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조직한 것이었다. 튀렌은 휘하의 스웨덴군과 연합하여 눈부신 전적을 거두었고, 5월 17일 시스마르샤우젠 전투에서 결정적인 행동으로 최후를 장식했다. 군대는 그 결과로써 더 확고해졌다. 휴전조약이 체결될때까지 화전과 백병전으로 바이에른을 황폐화 시켰다. 이 파괴는 많은 현대작가들이 비난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나, 당시 전시의 정신과 전투행위에서 허용한 상황보다 가혹한 방법이 채택된 것은 아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프랑스에게 짧은 평화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곧 [[프롱드의 난]](1648년 - 1653년)이 발발했다. 튀렌이 전쟁중에 벌인 행위의 일부가 반대파에 대한 그의 찬성에 의해 날카로운 비판에 휩싸이게 되었다. 바이마르군은 사령관인 튀렌을 따르는것을따르는 것을 거부했고, 튀렌은 남부 네덜란드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프롱드의 난 제1차가 끝나는 루이유 화의(1649년 3월)가 체결될때까지 머무르게 되었다.
 
2차 전투는 콩데 공작이 1650년 1월에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콩데 공작과 더불어 체포될 계획이 있었던 튀렌은 그때 도망쳐 롱그빌 공작부인 안느와 만나 콩데 공작, 그의 동생 아르망, 롱그빌 공작의 목적을 위해 스타네이를 확보했다. 프롱드의 난 제1차, 2차도 안느에 대한 애정이 튀렌의 행동을 지배했었던것으로 보이고, 콩데 공작을 위해 스페인의 원조를 얻었다. 이 전투에서 튀렌은 루트르에서 2,3번의 역전 중 하나를 생각했다(1650년 12월 15일). 그러나 2번째 대립은 같은해 빠른시기에 왕당파의 와해와 콩데 공작의 석방으로 종결되었다.
79번째 줄:
튀렌은 화해하고 1651년 5월 파리에 돌아왔다. 그러나 곧 파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콩데 공작이 다시 프랑스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 프롱드의 난 제3기에서 튀렌과 콩데 공작은 서로 대립하는 입장에 있었다. 튀렌은 왕의 군대를 지휘하고, 콩데 공작은 반란파와 스페인 연합군을 이끌었다. 1652년 3월 28일 자르조에서 젊은 병사의 용맹함을 튀렌은 보여주었고, 4월 7일 지안에서 베테랑 장군의 수완과 사나움을 보여주었다. 튀렌은 실질적인 상트노레 포 브르 전투(7월 21일)에서 내전을 깨뜨렸고, 10월 21일 다시 파리를 왕당군이 확보했다.
 
튀렌은 곧 콩데 공작과 스페인군과의 유인을 필요로 했으나, 스페인계 프롱드 반란무리의 전국이 길어지는것이길어지는 것이 튀렌과 콩데 공작 양측에게 계통을 확립할 지도력을 보여주기 위한 넓은 시야를 주었다. 1653년 튀렌은 유리했다. 콩데 공작이 로크로아만을 획득한 사이에 그는 루트르, 상드-무느와, 무종을 공략했다.
 
1654년 단기원정으로 다시 프랑스군이 유리해졌다. 1654년 7월 25일 왕당군은 아라스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1655년 프랑스군은 대부분의 영지를 얻었으나, [[1656년]] 튀렌은 바란시에느에서 그가 아라스에서 콩데 공작을 격파한것과 같은 방법으로 패배를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