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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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지는 [[밀직]][[제학]](密直堤學)을 지낸 김도(金濤)의 아들이며 [[세종]]대의 문신인 김여지(金汝知)의 형이다. [[우왕]] 때인 [[1385년]](고려 우왕 11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낸 뒤 [[조선]] 건국 후에도 벼슬을 하여 1404년(태종 4년)에는 집의(執義)를 지냈다. 그 뒤 [[형조]]참의, [[형조]]참판, 호조참판 등을 거쳐 1419년(세종 1년) 예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420년]](세종 2년)에는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대사헌으로 재직 시에는 당시의 세도공신(勢道功臣)을 직설적으로 탄핵하는 상소를 다섯차례나 올려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 외직인 원주목사, [[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28년[[1428년]](세종 10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동지총제(同知摠制) [[성개]]의 노비에 대한 판결이 잘못되었다 하여 파직되었다. 뒤에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재기용되고, [[1434년]]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관직에서 물러났다. 한문에 뛰어났고 음양·천문·지리·의약 등에도 통달하였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숭상하였다.
 
[[1435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배불론자의[[배불]]론자의 한사람으로 자신의 상(喪)을 《주자가례》대로 따르도록 유언을 남겼다. 후에 문정(文靖)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 사후 ===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산 27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는 후일 [[양평군]] 향토유적 제30호로 지정되었다.
 
강하면사무소 소재지에서 88번 도로를 따라 [[광주시]] 방향으로 2km정도 내려가면 [[강하면]] 동호리로 연결되는 마을도로가 나온다. 김자지의 묘는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약 2km 들어가 능곡교를 건넌 야산 자락에 소재해 있다. 김자지 묘는 부인인 정부인 평양조씨(貞夫人 平壤趙氏)의 묘소와 쌍분(雙墳)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를 비롯하여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묘비는 20세기 이후에 새로 오석으로 개수되었다. 김자지의 묘 오른쪽으로 동생인 [[김여지]]의 묘가 위치한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