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우드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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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망인 시절 ===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폐렴으로 급사하자 미망인이 되었다. 후계자이자 장남인 12세의 [[웨일스 공]]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5세]]로 즉위했으나 대관식에 앞서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와 함께 [[런던 탑]]에서 행방불명이 되었고, [[호국경]]이었던 [[에드워드 5세]]의 삼촌 글로스터 공작이 [[1483년]] [[6월 25일]] [[리처드 3세]]로 즉위하였다. [[리처드 3세]]는 즉위하면서 엘리자베스 우드빌에 대해 자신을 살해하기 위한 사악한 음모를 꾸몄으며 마녀 행위(witchcraft)를 한 여인으로 세상에 공표하였고,<ref>엘리자베스 우드빌이 마법을 부려 [[에드워드 4세]]를 홀리고 정적들을 살해하였다는 주장은 당대에도 이미 유명한 논란거리 중 하나였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어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역시 마녀 행위로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에게 고소를 당한 전적이 있었다.</ref>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혼인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하여 두 부부 사이의 자녀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였다.<ref>그러나 [[에드워드 4세]]의 후손들의 왕위 계승권이 박탈당하더라도 [[리처드 3세]]의 형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클래런스 공작]]의 살아남은 두 자녀의 왕위 계승권이 [[리처드 3세]]보다 더 우선했으므로 계승법상 [[리처드 3세]]의 즉위는 [[에드워드 4세]] 후손들의 왕위 계승권 여부와 무관하게 왕위를 찬탈한 행위였다.</ref> 결혼 무효의 이유로는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혼인하기 전 엘리노어 버틀러(Lady Eleanor Butler)와 이미 혼인 약속을 한 상태였으므로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혼인은 중혼(重婚)으로 불법이라는 점이 제시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5세]]의 후견이자 측근이었던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동생 [[앤서니 우드빌]], 전 남편과의 아들인 [[리처드 그레이]]를 체포하여 [[요크]]의 폰테프락트 성에서 처형하였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이 때 어린 자녀들과 함께 다시 성소로 도피하였다. 이때 [[랭커스터 왕가]]의 왕위 계승 후보자인 [[헨리 7세|헨리 튜더]]와 그의 생모 [[마거릿 보퍼트]]와 서신을 주고받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프랑스브르타뉴]]에서 망명중이던 [[헨리 7세|헨리 튜더]]가 [[영국]]으로 돌아와 [[리처드 3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를 경우 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결혼시키겠다는 비밀 협약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반란은 실패하였고, [[마거릿 보퍼트]]는 사권박탈을 당하였다.
 
[[리처드 3세]]의 즉위 직후인 [[1484년]] [[에드워드 4세]]에게 받은 왕비 영지를 박탈당하고 왕비의 칭호를 쓰는 것을 금지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후 [[리처드 3세]]의 처분은 관대해졌고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딸들은 [[런던 탑]]에 구금하지 않을 것이며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리처드 3세]]의 맹세에 의해 성소에서 나와 궁정에 복귀하였다. 특히 [[리처드 3세]]의 왕비 [[앤 네빌]]이 사망하자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리처드 3세]]의 신붓감으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리처드 3세]]는 이와 같은 소문을 부정하였다.
 
 
=== 튜더 왕조 시절 ===
[[1485년]] [[영국]]에 상륙하는 데 성공한 [[헨리 7세|헨리 튜더]]는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전사시켰고, [[헨리 7세]]로 즉위하여 [[튜더 왕가]]를 열었다. 이 때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혼인 무효는 취소되었고,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헨리 7세와 결혼하면서 엘리자베스 우드빌 역시 전 왕비의 칭호와 연금을 되찾았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