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제2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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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이반 아센 2세}}
[[File:Campaigns of Ivan Assen II.png|thumb|220px|[[이반 아센 2세]] 시기의 불가리아.]]
[[1217년]] [[이반 아센 2세]]는 용병을 이끌고 와 보릴에게 도전하였다. 7개월 간의 포위 끝에 보릴이 패배하였고<ref name="주석20">尚樹『ビザンツ帝国史』、719頁</ref>, 이반 아센 2세는 제위를 되찾았다. 그의 시대에 불가리아의 국력은 절정에 이르러 빼앗긴 땅들을 되찾고 [[아드리아노폴리스]]와 알바니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반 아센 2세의 치세 초반 헝가리와의 결혼 동맹을 통해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평화적으로 되찾았다. [[1223년]] [[에페이로스 공국]]이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면서 발칸 반도 정세의 중심으로 부상하자, 불가리아는 에페이로스와 협정을 맺었다. 한편 에페이로스와 대립하던 라틴 제국의 제후들은 이반 아센 2세에게 어린 황제 [[보두앵 2세]]의 후견을 요청하였고 이반 아센 2세는 이를 승낙하여 라틴 제국과 동맹 관계가 성립되었다. 에페이로스의 데스포트 데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는 맹약을 파기하고 불가리아를 침공하였지만, [[1230년]] 3월 9일 [[클로코트니챠 전투]]에서 이반 아센 2세는 대승을 거두었고, 테오도로스를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에페이로스 공국을 불가리아의 봉신으로 전락시켰다. 클로코트니챠 전투를 통해 불가리아의 강역은 트라키아의 대부분, 로도피 지역, 마케도니아 전역, 알바니아에 이르렀으며,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최대 판도와 맞먹는 영역을 지배하는 발칸 반도 제일의 대국으로 떠올랐다.<ref name="주석5">ディミトロフ、イスーソフ、ショポフ『ブルガリア 1』、94頁</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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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
[[File:Medieval Tarnovo.png|right|thumb|140px|중세 터르노보.]]
중세 불가리아의 도시는 언덕에 지어진 요새와 산기슭에 펼쳐진 주거 지역 및 상점들로 구성되었다. 터르노보, 소피아, 비딘, 바르나, 플로프디프, 스코피에, 소조폴, 안키알로(현 포모리에), 메젬브리아(현 네세버르), 드러스터르(현 실리스트라) 같은 도시들이 성장하여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하였고, [[제3차 십자군]]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는 인구가 대단히 조밀하여 요새지로 종종 이용되었다고 한다.<ref name="주석13" /> 요새는 천험의 땅에 건설되었고, 요새 안에는 영주의 저택, 교회, 병영 등이 존재하였다. 그러한 도시의 요새와 거주지의 구조는 수도 터르노보를 기반으로 하였다.<ref name="주석14"/><ref name="주석15"/>
 
[[File:Medieval Tarnovo.png|right|thumb|140px|중세 터르노보.]]
 
터르노보는 마을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언덕에는 차레베츠, 트라페지차 등의 요새와 요새화한 수도원이 세워졌다. 가장 높은 곳에 차레베츠 요새가 구축되었고 내부에는 궁전, 수좌주교구 교회, 귀족과 그들의 하인의 거주구들이 세워져 있었다. 도시 거주민은 봉건 귀족, 도시 부상들, 수공업자, 노동자 등으로 다양하였으며, 하층민들은 성 밖 [[얀트라 강]]둑에 거주하였다.<ref name="주석13" /> 민중들은 반수혈식 주택, 돌벽과 초가 지붕으로 이루어진 주택, 돌로 지어진 이층 주택, 목조 주택 등 다양한 유형의 집에서 생활했다.<ref name="주석14"/><ref name="주석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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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제 2차 불가리아 제국 시기 불가리아에서는 이단도 널리 퍼져 있어 제 1차 불가리아 제국 시기부터 등장하였던 [[보고밀파]]가 세력을 늘려 나갔다. 차르 [[보릴]] 시대에 차르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 사이에서 보고밀파가 유행하여 [[1211년]] 2월 터르노보 의회는 보고밀파에 이단 선고를 내려 그들을 박해하였다.<ref>ディミトロフ、イスーソフ、ショポフ『ブルガリア 1』、91頁</ref>
하지만 불가리아 사회에 정착한 보고밀파의 근절은 힘들었기 때문에<ref name="주석20"/> 정치적으로 안정된 이반 아센 2세 시대에 이에 대한 탄압은 완화되었다.<ref>クランプトン『ブルガリアの歴史』、38頁</ref> 14세기 들어 보고밀파는 민중들을 중심으로 확산하였고 다양한 종파가 탄생하였다.<ref name="주석21">森安、今井『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147頁</ref>
 
귀족층에서는 14세기 중반 비잔티움 제국에서 제창된 신비주의적 경향의 [[헤시카즘]]이 유행하였다. 헤시카즘은 정교회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점도 있었기 때문에 정교 교리에 편입되어 지배층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ref name="주석22">ディミトロフ、イスーソフ、ショポフ『ブルガリア 1』、109頁</ref> 헤시카즘은 이단, 부패한 성직자, 로마 교회와의 통합에 대한 비판 수단으로서 기능하고<ref name="주석21"/>, 문학과 예술의 발전에도 공헌했다.<ref name="주석22"/> 불가리아에서는 터르노보의 테오도시와 그의 제자 에브티미가 대표적인 헤시카즘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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