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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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시절 ===
==== 여유있는 집 ====
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알레스에서 7형제중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사르디니아의 [[민중]]들은 이탈리아 변두리에서 사는 가난한 [[소작인]]들이었지만, 그람시의 집안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여유가 있는 [[알바니아]] 사람의 후손이었다. 할아버지는 [[부르봉 왕가]]의 헌병대 [[대령]]이었으며, 이탈리아 왕국으로 이탈리아가 통일될때까지 [[대령]]계급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폴리]]출신으로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람시의 어머니도 [[보카치오]]시인의 글을 읽을만큼, 보기 드물게 지적 소양을 지닌 [[여성]]이었다.
==== 집안의 어려움 ====
부친은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버리고, 하급정부관리로 일하다가 공금횡령혐의로 [[구속]]되었는데, 언뜻 생각하면 비리에 대한 처벌이지만 그람시의 부친이 구속된 진짜 이유는 지방유지들에게 밉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지방유지들의 [[독재]]가 만연해 있었는데, 안토니오 그람시의 아버지는 이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ref>살림지식총서《안토니오 그람시-옥중수고와 혁명의 순교자》/김현우 지음/[[살림]] p.7</ref> 그래서 어머니는 [[1904년]] 아버지가 석방될때까지 삯바느질과 텃밭농사로 가정을 돌봐야 했고 쓰다버린 초의 토막을 다시 썼다. 4살때 사고로 [[장애인]]이 되어 병약<ref>그람시는 4살때 사고로 등이 굽는 장애인이 되었으며,신경성 질환등의 병들에 시달렸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이 스물다섯의 청년으로 장성한 후에도 조그만 [[관]]과 [[수의]]를 준비했다고 한다.하지만 그람시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회적 약자 곧 민중의 편에서 생각하는 [[진보]]적 [[지식인]]이 되게하였다. 자신이 [[장애인]]이니 [[민중]]들이 [[자본가]]와 [[지배]]계급의 [[폭력]] 곧 [[억압]]과 [[차별]]로 받는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느껴진 것이다.</ref>그람시도 하루에 열 시간이상 일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그럼에도 호기심, 상상력, 밝은 성격, 강한 의지를 가진 소년이었다. 몸이 약하니까 격렬하고 거친 놀이는 못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렸고 [[독서]]와 [[나들이]]를 좋아하며 고슴도치와 도마뱀을 보고 관찰하였다.
=== 사회주의 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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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
==== 배경 ====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 이유는 사회당이 투쟁정신을 잃어버린 채 적당히 자본가,지배계급과 타협하는 어용정당이 되어간다는 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사회당의 미온성 =====
1919-20년(붉은 2년) 토리노의 피아트 공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벌인 공장 평의회운동이 [[자본가]]들과 지배계급의 결탁으로 실패하자 그람시와 그의 동료들은 노동운동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사회당의 미온적 공장 평의회 지지 및 전반적인 [[보수주의]]성향에 있다고 보고 사회당을 이탈, [[1921년]] 리보르노에서 전투적 [[맑스-레닌주의]]의 면모를 갖춘 새로운 [[진보정당]]인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다.
===== 사회당의 무능함 =====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20년대]] 초에는 두 가지 상극적이지만 중요한 현상이 [[이탈리아]]에서 나타난다. [[노동운동]]이 대단한 호전성을 띠고 전개되는 한편, [[이탈리아]], [[독일]]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이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1915년]] 전직 사회주의자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에 의해 시작된 이탈리아 [[파시즘]]은 [[사회주의]] 운동에 공포심을 갖고 있던 제대군인들과 [[자본가]]들로부터 이미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당은 우유부단하고도 [[개량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정부]]와 타협하며 [[노동운동]]의 급진화에 제동을 거는 한편, 파시즘의 확산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 공산당내 이념논쟁 =====
초대 [[이탈리아 공산당]]의 총서기였던 [[아메데오 보르디가]]는 이탈리아 사회당(PSI)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통해 이탈리아 내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도록 명하던 [[코민테른]]과 갈등하고 있었다. 그람시는 처음엔 공식적으로는 보르디가 노선을 지지하며 공산당의 사회당과의 연합을 반대했으나, 날로 증대하는 파시즘 세력의 위협을 절감하면서 차츰 보르디가의 완고한 비타협적 태도에 회의를 갖기 시작, 코민테른의 연합전선론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결국 끝까지 사회당 독자혁명을 고집하던 보르디가는 당내에서조차 차츰 지지 기반을 상실하고, 1924년에서 1926년 사이 그람시가 결정적으로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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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references/>
{{Authority control}}
 
[[분류:1891년 태어남|그람시, 안토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