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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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임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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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1년]](명종 6년) 순천군수 신여량(申汝梁)의 딸과 결혼했다. 17세 때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그해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 뒤 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병으로 복시를 못 치러 과거를 포기하였다. 이후 아버지 [[성수침]]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다시 [[백인걸]](白人傑)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백인걸]]에게서 그는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와 본격적으로 나이를 초월한 도의지교를 맺었다.
 
아버지 [[성수침]]의 문하생인 장포(長浦) [[김행 (1532년)|김행]](金行) 역시 [[성수침]]의 문하와 [[백인걸]]의 문하에서 동시에 수학하였다. 장포(長浦) [[김행]]은김행은 그를 친아우처럼 아꼈고, 평생 그와 형제처럼 지냈다.<ref>[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8525 김행]</ref>
 
그 뒤 관직에 나가는 것 대신 학문 연구와 독서로 소일하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등을 찾아가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논하기도 하였다.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인심, 도심에 대한 견해에 감격한 그는 그 뒤 [[이이]]와 '사단칠정 이기설'을 토론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였다. 또한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이]]의 이기일원론의 절충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이이]]의 이기일원론에 반대하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