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세르지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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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오 1세는 [[692년]] 트롤로 또는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나온 새로운 결정들이 [[로마]] [[교회]]의 규정들과 어긋나므로 거절하였다. 그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주교]]들은 동방 교회에 속해 있었으므로 결혼한 성직자들을 재가하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사순절]]의 규정은 [[서유럽]]의 교회와 차이가 있었다. 로마 교회 사절들도 그 결정에 서명을 하였으나 세르지오 1세는 거절하였다.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비잔티움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세르지오 1세의 두 참모를 체포하고 세르지오 1세까지 체포하려 했으나 라벤나, 펜타폴리스, 로마의 시민군들이 이를 저지하였다.
 
세르지오 1세의 행동에 분노한 유스티니아누스 2세 황제는 특사 세르기우스에게 지시하여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교황 사절단장 자격으로 참석한 포르투스의 주교 요한과 교황의 고문 보니파시오를 체포하였다.<ref name="e223"/>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고위 관료 두 명이 교황에게 경고하기 위해 그를 방문하였다.<ref name="e223"/> 결국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악명 높은 장교 자카리아스에게 세르지오 1세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하라고 지시하였다.<ref name="e223"/> 이에 자카리아스를 [[라벤나 총독]]과 [[펜타폴리스 공작]]에게 군대를 동원하라고 지시하였지만, 무위로 돌아갔다.<ref name=DWB/><ref name="e224">Ekonomou, 2007, p. 224.</ref> 자카리아스는 세르지오 1세를 체포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시민군의 거센 저항으로 오히려 자기 목숨을 거의 잃을 뻔 하였다.<ref name=DWB/><ref>Ekonomou, 2007, p. 44.</ref> 세르지오 1세는 반 (反)콘스탄티노폴리스 정서를 가지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흥분한 시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ref name="e224"/>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