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정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4번째 줄:
 
이튿날 우가 진평중(陳平仲)을 보내어 여러 장수에게 전교(傳敎)하기를, “명을 받아 국경을 나갔다가 이미 절제(節制)를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고, 또 강상(綱常)을 범하여 이런 분란의 조짐을 부른 것은 진실로 부덕한 나 때문이다. 그러나 군신의 대의는 실상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경이 글 읽기를 좋아하니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리오. 하물며 또 강토는 조종에게서 받았으니 어찌 쉽게 남(명 나라)에게 줄 수 있는가. 군사를 일으켜 막는 것이 낫겠다 하여 여러 사람에게 모의하니, 모두들 가하다 하였는데, 이제 어찌 감히 어기는가. 비록 최영을 지목하여 핑계하였지만 영이 내 몸을 호위하는 것은 경들이 아는 것이요, 우리 왕실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 역시 경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교서(敎書)가 이르는 날에 완미(頑迷)한 것을 고집하지 말 것이며, 잘못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말고 함께 부귀를 보존하여 시종(始終)을 도모하기를 내가 진실로 바라노니,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다. 또 설장수를 보내어 군사 앞에 나가서 장수들에게 술을 주고 그 뜻을 알아보려 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나와서 도성 문 밖에 둔을 쳤다.
 
 
라는 내용을 보았을때 우왕이 요동정벌은 조정의 일치된 공론으로 추진된 일이라는 교지에 이성계측이 이에 아무런 재반론 상소를 올리지 못한 것으로 보아서 이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선왕조의 사료조작이사료조작으로 유력하다보인다. 시중(侍中) [[최영]](崔瑩)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음력 4월에 요동정벌을 같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우왕과 더불어 평양으로 떠났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하여 좌우군 3만8천8백여명(10만명이라는 설도 있음)에게 요동으로 떠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