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피에르 죄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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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시]]에서 공부를 마친 후 [[광고]]와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등을 찍기 시작하였다. [[1991년]] 첫 [[장편영화]] 《델리카테센》로 유명해졌다.
 
장 피에르장피에르 죄네는 프랑스 루아르데파르망(縣)에 있는 로안시(市)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살에 Cinémation Studios에서 애니메이션을 배우는 동안, 처음 카메라를 샀고 단편영화들을 찍었다. 장 피에르 죄네는 보수적인 성장환경 때문에 영화 학교에 다니지 못해 전통적인 의미의 영화 공부를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직감에 따라 해 가면서 모든 것을 터득했다고 말한다. 열두 살 때 뷰마스터(눈에 대고 보면 3차원 영상이 보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시작됐다. 효과음과 대사, 음악을 녹음하고, 소리에 맞춰 이미지들을 돌리면서 극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그 뒤로 애니메이션으로 눈길을 돌렸고, 그 일이 영화감독으로 향하는 큰 밑받침이 되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영화는 [[세르조 레오네의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와 [[스탠리 큐브릭의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와 피오트르 라믈레의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먼저 세르조 레오네의 <원스 어픈 어 타임 인더 웨스트>를 보고 처음으로 영화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를 극장 화면으로만 열네 번 보며 영화에서 영상 미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게 된다. 피오트르 라믈레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애니메이션의 놀라운 잠재력에 매료되었고, 그 계기로 마크 카로와 함께 인형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장 피에르 죄네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영화 연출의 대부분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는 만화작가이자 디자이너인 Marc Caro와 친구가 되었고, 마크 카로는 후에 협력자이자 조감독이 되었다. 죄네와 카로는 애니메이션을 같이 만들어 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들의 최초 실사영화는 <The Bunker of the last gunshots(1981)>인데 어두운 미래의 병사에 관한 단편영화이다. 죄네는 또 수많은 광고와 Jean Micheal Jarre의 Zoolook(카로와 함께)같은 뮤직비디오들을 감독하였다.
 
죄네와 카로의 첫 장편영화는 <Delicatessen(1991)>이다. 전염병이 창궐해 망해가는 세기말적 미래가 배경인 블랙코미디 영화이다. 주 내용은 델리카트슨에서 아파트를 운영하는 도살업자가 세입자들을 음식 공급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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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어 <The city of lost children(1995)>를 만들었다. 어두운 내용의 판타지 영화이다. 미친 과학자가 그의 나이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 어린이들의 꿈을 훔치는 내용이다. The city of lost children의 성공은 <에일리언4(1997>의 감독 제의로 이어졌다. 에일리언4는 미술 디자인에 도움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주네의 이름만 단독으로 올리게 된다.
 
죄네는 에일리언4 연출을 하고 난 뒤 프랑스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한 영향으로 다음 프로젝트 [[오드리 토투]] 주연의 <[[아멜리에]](2001)>를 쉽게 찍을수 있게 되었다. Amelie는아멜리에는 그의 전작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다. 로맨틱하고 희극풍의 요소와 함께 이전에 어두운 미장센들이 많이 결핍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카로의 적은 참여에 따른 결과로 여겨지곤 한다. 영화 Amelie는아멜리에는 동명의 여주인공이 좋은일을 하는데에 행복을 느끼지만 그녀는 정작 사랑을 찾지 못하는 내용이다. 평론가들의 호평과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이뤘고 여러 아카데미 후보에 지명되었다. 또 이 영화로 죄네는 유러피안 영화제에서 최고감독상을 받았다.
 
2004년도에 죄네는 Sebastien[[세바스티앵 Japrisot의자프리소]]의 원작, A very long engagement를 개봉했다. 오드리 토투 주연의 영화로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실종된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여자의 일대기를 그렸다.
 
2006년도에는 해리포터와[[해리 불사조기사단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감독제의를 거절했다.
 
2007년도에는 얀 마탈 원작소설 파이이야기를 동명 영화의 감독을 하려고 했으나 금전적인 문제로 연출을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