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준비위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로봇의 도움을 받아 동음이의 처리: 송진우 - 송진우 (정치인) 문서로 링크 바꿈; 예쁘게 바꿈
17번째 줄:
여운형이 총독부와 교섭을 한 이유는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에 조선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떠난다거나 해방 직후에 민중 내에서 친일파를 처단한다는 이름으로 사적인 감정에 기인한 마구잡이식 보복성 살인으로 사회 분열이 일어나고 혼란이 일어나 힘없는 사람들이 거기에 말려 억울한 피해를 입을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ref>그러나, 여기서 [[한민당]]은 '여운형이 일본으로부터 2천만엔 돈받았다. 건준은 총독부와 연탁한 조직.'이라며, 근거없는 헛소문을 퍼뜨렸다.</ref>
 
이에 총독부 정무총감은 이 조건에 수락하였다. 그날 밤 [[여운형]]은 자신이 이미 1년 전인 [[1944년]] [[8월]]에 결성했던 지하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게된다. 이어서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정치범(독립운동가)들을 석방시키고 건준위로 편입시켰다. 건국준비위원회 발족한 지 이틀이 지나자, 체계적인 조직망을 갖추면서 확대 개편해 나아가게 된다.<ref>KBS 인물 현대사, 여운형편 참조.</ref>
 
건준 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
26번째 줄:
 
'''건국동맹 강령'''
<br />
*① 각인 각파는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 제세력을 구축 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② 반추축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것.
*③ 건설부면에 있어 일체 시정을 민주주의적 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br />
<br />
'''건국준비회 선언'''
<br />
<br />
인류는 평화를 갈망하고 역사는 발전을 지향한다. 인류사상의 공전적참사인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우리 조선에도 해방의 날이 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서 제국주의적 착취와 억압하에 모든 방면에 있어서 자유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36년간 우리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을 계속하여왔다. 이 자유 발전의 길을 열려는 모든 운동과 투쟁은 제국주의와 및 그와 결탁한 반동적 반민주주의적 세력에 의하여 완강히 거부되어왔다.
<br />
<br />
전후 문제의 국제적 해결에 따라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기반(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민족의 해방은 다난한 운동사상에 있어 겨우 새로운 일보를 내딛었음에 불과하나니 완전한 독립을 위한 허다한 투쟁은 아직 남아 있으며 새 국가의 건설을 위한 중대한 과업은 우리의 전도에 놓여 있다. 그러면 차제에 우리의 당면임무는 완전한 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데 있다. 일시적으로 국제세력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나,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도와줄지언정 방해치는 않을 것이다.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고 자유 발전의 길을 열기 위한 모든 진보적 투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국내의 진보적 민주주의적 여러 세력은 통일전선의 결성을 갈망하고 있나니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의하여 우리의 건국준비위원회는 결성된 것이다.
<br />
<br />
그러므로 본준비위원회는 우리 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에로 재조직하기 위한 새 국가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적 제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여 각층각계에 완전히 해방된 통일전선이요, 결코 혼잡된 협동기관은 아니다. 왜 그런고 하면 여기에는 모든 반민주적 반동세력에대한 대중적 투쟁이 요청되는 까닭이다. 과거에 있어서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민족적 죄악을 범하였고 금후에도 그들은 해방 전 조선과 같이 그 건설도중에서 방해할 가능성이 있나니 이러한 반동세력, 즉 반민주주의적 세력과 싸워 이것을 극복 배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하여 강력한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정권은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으로서 구성될 것이며 그동안 해외에서 조선해방운동에 투신하여온 혁명전사와 그 결집체에 대하여서는 적당한 방법에 의하여 전심적으로 맞이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조선 전민족의 총의를 대표하며 이익을 보호할 만한 완전한 새 정권이 나와야 하며 이러한 새 정권이 확립되기까지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본위원회는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완전한 독립국가조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 정권을 수립하는 한 개의 잠정적 임무를 다하려는 의도에서 아래와 같은 강령을 내세운다
<br />
<br />
'''강령'''
<br />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요구를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57번째 줄:
건준은 광복이후 '''최초의 정치단체'''와 '''한국 현대사 최초로 지방자치를 시행한 조직'''이라는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둔다. 후에 건준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정부화되면서 지부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8월 말까지 민중들의 지지와 호응에 부응하여 전국적<ref>한반도 이남,이북 안가리고 한반도 전체를 의미한다.</ref>으로 140여개의 지부가 확장되어 설립되었다.<ref>후에 1948년에 [[한민당]]세력에서 편찬한 '한국민주당소사'에는 건준위원장 [[여운형]]이 총독부 정무총감으로부터 2천만엔 받았으며, 건준은 총독부와 연탁한 단체'라고 '천하공지의 사실'이라며 그근거로 건준이 8월 15일~8월 31일동안 전국적으로 140여개 지부가 설치되는 것은 총독부로부터 막대한 정치자금없이 불가능하다고 논지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커다란 왜곡이다. 일반적으로 조직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건준은 중앙에서 지부를 세운것이 아닌 거꾸로 지방유지들이 세운 건준지부를 건준중앙에서 심사하여 사후승인하는 방식으로 택했고, 따라서 건준지부는 사업체로치면 일종의 독립채산제 비슷한 구조였다. 즉 건준본부에서 돈이 내려가지 않아도 해방을 맞은 각처 지방유지들과 민중들은 건준의 이름을 얻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서 각처에 지부를 조직했었다. 설령 한민당 주장처럼 총독부에서 받은 돈이 있었다 하더라도 건준본부는 돈과 함께 전국적으로 설치된 140여개 지부에 조직책을 내려 보낼만한 인적자원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임영태 지음. 대한민국 50년사> 인용.</ref>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사업은 북한 지역에서도 진행되었다. 북한 지역에서 주도한 지도자는 고당 [[조만식]]이었다. 조만식은 평양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도 '비폭력적이면서도 비타협적인 노선을 견지한'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한반도 이남과 이북의 서로 다른 지역 조건에서 [[여운형]]과 [[조만식]]이 동시에 건국사업에 착수했다.<ref><대한민국 50년사>, 임영태 지음. 들녘 출판사. p27</ref><ref>조만식은 북한지역에서 상당한 신망과 지지를 얻었던 우국지사였다. 일제강점기 당시만해도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 불렸을만큼 [[기독교]] 영향이 매우 강하게 자리잡았던 곳이다.</ref>
64번째 줄:
 
=== 건준내 갈등과 해체 ===
그러나 [[김성수 (1891년)|김성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같은 국내의 우익세력들은 '중경 임정 지지'를 선언하여 건준에 불참하였고, [[1945년]] [[9월 4일]] 건준 전체회의가 열려 부위원장에 좌파 변호사 [[허헌]]을 세우는 등 집행위원 개편이 되었는데, 여기서 [[박헌영]]의 공산당계열이 주도권을 잡아 주도해 나아감에 따라 건준의 본질적인 중도적 정치노선 성향은 변질되어갔고, [[9월 6일]] 밤에 경기여고 강당에서 약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인민공화국임시조직법'을 통과시킨 다음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을 선포했다. 인공 형태로 개편시켜 나아감에 따라 [[9월 7일]] 건준은 '발전적 해소'라는 미명 아래 [[인민위원회]]로 각 지역 지부로 개편되었다.<ref>1945년 9월 4일~아래 사라졌다.: 허은, 〈8·15직후 민족국가 건설운동〉, 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역사비평사, 2000) 307~308쪽.</ref> 이후 '인공'은 [[박헌영]]을 주축으로 실권장악하게 되었다.<ref>이당시 여운형 측에서는 건준의 좌경화로 '인공'으로 선포된것에 대해 결코 원하지 않았고, 인공 개편도 여운형이 소외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여운형은 인공의 탄생에 대해 '자궁 외 임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강하게 반발했으며, 인공 내각 명단에 자신이 부주석으로 오른 것에 대해 기뻐하기보다 [[박헌영]]과 [[허헌]]의 경거망동을 한탄했다고 한다.</ref> 곧 이어 9월에 미군이 한반도에 입성하면서 미군정의 직접통치를 발표하는 '[[맥아더 포고령 1호]]'에 따라 국내에서 치안, 행정 업무를 담당했던 '건준'과 '인공'은 불인정되었고, 심지어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불인정되었다. 그 이후 38선 이남에서는 [[미군정]]기가 시작되게된다.
 
== 의의와 한계 ==
77번째 줄:
반면에 건준 위원장을 지냈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건국준비위원회가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된 과정에 대해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으며, 형님(여운형)에게는 [[박헌영]]등 극렬 공산주의자와 손을 끊지 못하고 건준이 좌경화되어 이용당한 것이 정치생활 중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한계성을 지적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62쪽.</ref>
 
== 같이보기 ==
* [[여운형]]
* [[조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