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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 선교사는 여성 교육 사업과 병행하여 전도부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도부인 양성사업도 주력했다. 이 모든 비용은 그녀의 개인 재산, 후원금, 그녀의 활동을 본 캐롤라이나, 텍사스 지역 목사들의 헌금 송금과 진료 물품, 의료기구 지원 등도 추가되었다. 또한 조선인으로는 [[윤치호]]와 [[이상재]]가 기탁금을 기부, 그녀의 활동을 도와주었고 경비원과 통역사와 식모, 차량 등을 마련해주었다. 그녀의 전도 활동, 치료와 진료를 병행한 선교활동으로 신자들의 수는 늘었고, 처음에는 배화학당 학부모들 중심이었으나 학부모 외에도 학생들의 가족, 친척, 이웃, 동리 사람들 등 신자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목회자는 따로 없는 작은 예배당이었고 그녀가 직접 예배당을 관리하였다.
 
그 뒤 루이스 워커 예배당의 규모가 확장되면서 정춘추 전도사와 홍다비다 전도부인 중심의 신앙 공동체는 외부로 독립하여 종교교회(宗橋敎會)가 되었다. 종교교회가 설립되자 [[윤치호]]는 매일 출석하며 평신도의 신분으로 이 교회를 적극 지원하였다. 그리고 윤상은 전도사와 루이스 워커 기념예배당 잔류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교교회(紫橋敎會)로 발전했다고 한다.
 
=== 출국과 재입국, 최후 ===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1919년]] 되돌아오려고 비용 마련을 위해 노동과 아르바이트 등에 종사하였고 [[일제 강점기]] 조선으로 돌아오려 준비하던 중 과로로 신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의 친지들은 병이 회복된 뒤에 여행하라고 권유했으나 사업을 중단할 수 없다며 병이 낫지 않았는데도 퇴원, 1919년 8월 무리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변변한 병원하나 존재하지 않았고, [[1920년]] [[11월 12일]] [[경성부]] 종로정 고간동(종로구 고간동, 현 내자동)에서 별세했다. 향년 67세였다.
 
장례식은 1920년 11월 15일 배화학당장으로 거행되었고, [[윤치호]], [[이상재]], [[김성수 (1891년)|김성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 조선인 지도자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배웅하였다. [[경성부]] 양화진 제1묘역 나-7호에 안장되었으며 비문에는 그가 생전에 남긴 말 중 한마디인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가 기록되었다.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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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화여자대학]]
 
{{기본정렬:캠벨, 조세핀 필}}
 
[[분류:1853년 태어남]]
[[분류:1920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