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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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은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밀리기 시작했다. 이괄은 [[3월 29일]]([[음력 2월 11일]])에 군대를 둘로 나누어 [[장만]]과 [[임경업]]이 지키는 길마재를 포위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수구문]]을 나와 [[광주시|광주]]로 향하다가 장만, 정충신, [[남이흥]] 등이 이끄는 관군의 추격으로 완전히 흩어졌고 이 과정에서 이괄의 군사에 의해 [[정철|송강 정철]]의 사위이자 [[광주광역시|광주]] 목사인 [[임회]]가 살해당했다.
 
도망가던 이괄은 [[4월 2일1일]]([[음력 2월 15일14일]]) [[이천시|이천]]에서 아들 이전, 부하 한명련과 함께 부하 [[기익헌]], [[이수백]]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반란은 마무리되었고, 반란군에 투항했던 [[이흥립]]은 자결했으며 이괄이 왕으로 세운 [[흥안군]] 또한 왕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국문도 없이 간신배 [[심기원]]에 의해 처형당했다. 하지만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 형제가 [[후금]]에 투항하여 [[강홍립]] 휘하로 들어가 이후 [[정묘호란]]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ref>《인조실록》, 10권,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id=kpa_10309001_001&pId=kpa_10309001_001 비변사에서 강홍립 등에 대한 조처를 건의하다], 1625년 9월 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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