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의료체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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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식이 확산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현장의 지휘체계로는 자발적으로 모여든 시민, 의료진 등이 조직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고 경찰, 구급대, 민간구조대 등이 뒤엉켜 구조된 환자를 취재진 앞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나서기도 했다<ref>부실-비리 합작 안전불감'백화점'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취재기자 방담, 한겨레 신문, 1995년 7월 24일, 20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ref>. 한편 선진국에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던 현장에서의 중증도 분류(triage)도 이뤄지지 않았다<ref name="disaster"/>.
 
또한 사고 초기, 현장 인근의 [[강남성모병원]]에는 사고 발생 직후 30분간 180명의 환자들이 한꺼번에 이송되어 응급진료 한계를 순식간에 초과해 버린 반면, 사고 소식을 듣고 병상을 비워 놓고 있던 [[서울대병원]]에는 한명의 환자도 후송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추후 [[강남성모병원]]으로 이송한이송된 위급한 환자들을 다시 다른 병원으로 재이송하느라 결국 환자 생명에 직결될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이 사건을 두고 당시 대한외상학회 왕순주 총무는 "재난의료체계의 기본인 통신 체계, 현장처치 체계, 이송 체계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 사건이다"라고 말했다<ref name="disaster">후송 응급 조치 총체적 허점, 경향신문, 1995년 7월 5일, 4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ref>.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응급의학]]이 전문 진료과목으로 인정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95년 [[응급구조사]]가 공식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하였고, 1996년 첫번째 [[응급의학과]] [[전문의]] 시험이 치러졌으며, 2000년 현재와 같은 [[응급의료기관]] 체계가 수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