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룡: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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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2008-05-17
}}</ref>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음반 상점을 운영하였고, 두 살 아내의 여동생 이난영을 가수로 데뷔시켰다.
 
이난영은 인기 가수가 되어 악극단에서 만난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였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작곡가였던 김해송은 처남이 된 이봉룡에게 작곡을 가르쳐주었다. 이봉룡은 1930년대 후반에 데뷔하여 동생 이난영이 부른 〈목포는 항구다〉(1942)가 크게 히트하는 등 인기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 노래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지금까지도 목포를 상징하는 곡으로 남았다.
 
이봉룡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인 [[남인수]]의 〈낙화유수〉와 〈남아일생〉 등 널리 불리는 노래를 계속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군국가요 작곡에 참여한 일이 있다.<ref>{{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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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이난영과 김해송의 딸들이 결성한 음악 그룹 [[김시스터즈]]의 멤버 중에는 이들과 외사촌 사이인 이봉룡의 딸도 포함되어 있다. 이봉룡은 1956년에 대한레코드작가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58년에는 센츄리(Century)레코드 전속작곡가로 있었으며, 이후 음반 기업을 운영하다가 [[1960년대]] 후반에 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하여 생활했다.
 
말년까지 작곡 활동을 계속했으며, 1961년부터는 직접 엘케엘(LKL)레코드를 운영하기도 했다. [[1969년]]에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음악 활동을 중단했다. [[1986년]]에 잠시 귀국하여 여관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1월 9일]] 사망했다. <ref name="이봉룡1">《문화원형백과》,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이봉룡, 李鳳龍), 한국콘텐츠진흥원(문화콘텐츠닷컴, 2009년)</ref><ref name="이봉룡2">「한국 작곡가 사전」, 이봉룡(李鳳龍),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저, 시공사(1999년, 342~518p)</ref>
 
== 가족 관계 ==
본명이 이옥례(李玉禮)였던 이난영이 인기 가수가 되자, 악극단에서 만난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였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작곡가였던 김해송은 처남이 된 이봉룡에게 작곡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1950년]] 6·25남침 때 김해송은 납북됐고 홀로있던 이난영에게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 남인수가 연민의 정을 표하며 다가왔다. 2살 아래의 연하였지만 우정을 넘어 연정이 싹튼 두 사람은 세간의 입방아를 무시하고 동거생활을 하였다. 남인수 또한 1962년에 41세 나이로 요절했다. 이난영은 1965년 4월 49세 나이로 회현동 빈집에서 죽었다.
 
이난영은생전에 인기 가수가 되어 악극단에서 만난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였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작곡가였던 김해송은 처남이 된 이봉룡에게 작곡을 가르쳐주었다.오빠 이봉룡은 1930년대 후반에 데뷔하여 동생 이난영이 부른 〈목포는 항구다〉(1942)가 크게 히트하는 등 인기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 노래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지금까지도 목포를 상징하는 곡으로 남았다. <ref name="이봉룡1"/><ref name="이봉룡2"/>
 
== 같이 보기 ==
* [[이난영]]
 
== 주석 ==
<references/>
 
== 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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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2008-05-17
}}
* 「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저, 현실문화연구(2008년, 521~537p)
 
== 주석 ==
<references/>
 
[[분류:1914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