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마산 의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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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마산시위'''는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시위이며, 정부의 부정선거 행위에 대항해 의롭게 거사를 했다는 뜻에서 '''3·15 의거'''라고 부르기도 한다. 3·15 마산시위는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3월 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3.15의거를 [[대한민국의 기념일|국가기념일]]로 정하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을 의결하고, [[3월 12일]]에 공포하였다.<ref>경남CBS 최호영 기자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412700 '마산 3.15의거' 국가기념일 지정…국무회의 통과] [[노컷뉴스]] 2010년 3월 9일</ref>
 
== 개요 ==
[[파일:1960년 4월 11일 동아일보.jpg|썸네일|350px|right|1960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3.15 마산시위를 다룬 기사.]]
 
[[1960년]] [[3월 15일]]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했다. 이들은 당사로 돌아와 10시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했으며, 이내 시위를 준비했다. <ref> 마산시의 민주당~:연시중,《한국정당정치실록 2:6·25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지와사랑, 2001),233쪽. </ref> 민주당 의원 [[정남규 (1917년)|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이 앞장섰고, 저녁 7시 30분경 1000여 명의 마산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였다. 민주당 간부와 시민, 학생으로 이루어진 시위대가 행진해 감에 따라 수천 명이 합류하였다. 경찰이 정남규 등 당 간부들을 연행하면서 강력 대응하자 오히려 시위 군중은 더욱 늘어나 밤 8~9시경에는 만여 명이 넘었다. 이때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 중 정전되자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는데, 경찰의 발포는 시위대를 더욱 분노시켜 경찰에 돌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파출소,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ref>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연시중,《한국정당정치실록 2:6·25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지와사랑, 2001),234쪽. </ref>, 파출소장의 집 등을 부수었다.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을 뿐만 아니라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난 인물이다.<ref> 허윤수는 민주당으로~:정용욱,〈이승만 정권의 붕괴(3.15~4.26):이승만 정부의 대응 및 미국의 역할과 관련하여〉,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한국현대사의 재인식 4:1950년대 후반기의 한국사회와 이승만정부의 붕괴》(오름, 1998),240쪽.</ref>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당했다.<ref>경찰의 발포로~:동아일보사,《민족과 더불어 80년:동아일보 1920~2000》(동아일보사, 2000)340쪽. </ref> 또한, [[4월 11일]] 아침 당시 [[마산용마고등학교|마산상업고등학교]]의 학생이었던 [[김주열]]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시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광주에서는 투표소에서 부정표를 발견한 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이 발단이 돼 시민 1천여 명이 낮 12시45분부터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148624 "3·15의거 광주서 시작"…민주주의 장송 데모 재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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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조사단은 이날의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총격이 시위대의 해산이 아닌 살상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밝혀 내었다. 하지만, 정작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마산 시위가 공산당이 사주해서 벌어진 일인 양 주장하였다.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정치부 기자들과의 회견 자리에서 마산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강경 대응을 따져 묻자,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ref>이만섭, 〈이승만의 몰락,피플파워 현장:이만섭 전국회의장 회고 3·15마산의거〉《신동아》1995년 4월, 309쪽. </ref>
 
{{인용문|총을 줄 때는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3.15 마산 발표 사건에 대한 회견 中 이기붕<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81400209205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8-14&officeId=00020&pageNo=5&printNo=16882&publishType=00020 시류가 남긴 정치어록] - 동아일보 1976년 8월 14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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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15국립묘지.JPG|thumb|245px|3.15 국립묘지의 유영봉안소.]]
[[파일:3.15국립묘지조형물.JPG|thumb|245px|국립묘지에 설치된 조형물 "정의의 상".]]
사건이 발생한 지 9년이 지난 [[1969년]]에 마산시 구암동의 애기봉 일대에 1,200평으로 사건 당시 희생자의 묘역을 조성하여 이듬해 [[1월]]에1월에 묘 13기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이후 [[1994년]] 이곳을 성역화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뒤 [[1996년]]에 계획이 확정되면서 [[1998년]] [[3월]]부터3월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2002년]] [[7월 22일]] [[마산시]]가 묘지 일대의 관리권을 [[국가보훈처]]로 이관하였고, 이후 [[8월 1일]]에 국립 묘지로 승격되었다.<ref>대통령령 제17668호</ref> 승격 이후 [[9월 11일]]에 국립 묘지 관리소가 설치되었고<ref>대통령령 17730호</ref>, 5년간의 공사 끝에 시위 43주년이 되는 날인 [[2003년]] [[3월 15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2010년]] [[7월 1일]] 마산시가 [[창원시]]에 통합됨에 따라 행정구역상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속하게 되었다.
 
== 기념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