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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a cheol .jpg|thumb|200px|나철]]
'''나철'''(羅喆, [[1863년]]<ref> 나두영(나철의 본명)의 문과방목에는 생년이 1859년으로 기재되어있다. </ref> [[12월 2일]] ~ [[1916년]] [[8월 15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대종교]]의 창시자이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개명은 '''나인영'''(羅寅永)<ref>[http://www.mediagaon.or.kr/jsp/search/SearchGoMain.jsp?go_code=L&gid=HSS19000503u00_ITEM_028 한국언론진흥재단], 황성신문(皇城新聞) - 1900년 05월 03일 (97호) ~ 05월 05일 (99호) / 廣告 : 前注書羅斗永名改以璌永辱知君子僉諒 / 1900년에 나두영이 나인영으로 개명했음을 알 수있으며,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기사에서는 나인영을 羅'璌'永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http://www.mediagaon.or.kr/jsp/search/SearchGoMain.jsp?go_code=L&gid=HSS19000503u00_ITEM_028</ref>이며 아호는 홍암(弘巖)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를 지냈으며, [[1897년]](광무11년) 2월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매국대신(賣國大臣)을 저격한 죄로 귀양살이를 하였고, 귀양이 끝나자 정계와 손을 끊고 민족의식의 집결을 위한 국조(國祖) [[단군숭배]] 사상을 고취하며 수도(修道)에 전념하였다. [[1916년]] 일본 천황과 국회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서(長書)를 보내고 자결함으로써 순교(殉敎), 순국(殉國)하였다. 아버지는 유학 나용집(羅龍集)이다.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ref name="나철">『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대종교총본사(1971년)</ref>
 
== 생애 ==
[[전라남도]] [[보성군|보성]] 출신<ref>[http://db.history.go.kr/url.jsp?ID=ch_ad_1900_05_03_0020 나철의 출신지는출신지]는 전남 보성이지만, 1891년 식년문과에 급제할 당시 그의 거주지는 낙안(樂安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이었고, 1900년 나인영으로 개명할 당시에는 전북 전주에 살았다. http://db.history.go.kr/url.jsp?ID=ch_ad_1900_05_03_0020 </ref> <ref> 한편, 그의 독립유공자 포상자 공적조서에는 본적이 전남 순천으로 기재되어있다. 공훈전자사료관, 포상자 공적조서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merit/search_merit_view.jsp?manage_no=1624&judge_case_item_cd=196200_SSG00005_1624&keyword= 한편, 그의 독립유공자 포상자 공적조서에는 본적이 전남 순천으로 기재되어있다. 공훈전자사료관, 포상자 공적조서]</ref> 인 그는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고 1891년(고종 28)에 식년문과에 급제<ref> 나두영의 문과방목,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91_014893&curSetPos=2&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B 나두영의 문과방목], </ref>하고 이어 1891년에 가주서에 제수되고, 1895년에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귀향한 후 1904년에 [[강진군|강진]]의 [[오기호]], [[부안군|부안]]의 [[이기 (1848년)|이기]], 최전(崔顓) 등 호남 출신의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고,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6월에는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한 단식농성을 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이철, 강원상(康元相) 등을 포섭하여 오적암살단을 결성,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07년 자수하여 지도(智島)에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으나, 1년후 풀려났다.
 
그 후 나철은 민족 종교 운동에 주력해 [[1909년]] [[1월 15일]] [[한성부]]에서 [[대종교]]를 창시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로는 [[일본 제국|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 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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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배검([[단군]])에게 [[제천의식]]을 올린 뒤 순명삼조(殉命三條, 한배님께 제천하고, 대종교를 위하고, 한배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저서에 대종교 경전인 《신리대전(神理大全》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맏아들 [[나정련]], 둘째 아들 [[나정문]]도 대통령 표창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오늘날 [[대종교]]에서는 음력 1월 15일을 [[중광절]](重光節, 나철이 대종교를 창시한 날), 음력 8월 15일을 [[가경절]](嘉慶節, 나철이 순교한 날)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ref name="나철"/>
 
== 구국운동 ==
구국운동(救國運動)의 일환책으로 1909년 오기호(吳基鎬)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셔 놓고 <단군교 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것이 [[단군교]], 즉 [[대종교]]의 시작이다. 1년 뒤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신도수 2만여 명으로 증가),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는데 [[1914년]]에는 본사를 그곳으로 옮겨 포교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넓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였고 교단의 존폐위기에 봉착한 [[나철]]은 이듬해 [[1916년]] [[8월 15일]]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에서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2세 교주가 된 [[김교헌]](金敎獻)은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和龍)으로 옮긴 뒤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포하는 한편,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켰으며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음해에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김교헌은 통분 끝에 병으로 죽었다. 김교헌은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을 저술하였다.
 
3세 교주가 된 윤세복(尹世復)은, 일제의 압력을 받은 길림성장(吉林省長) 장쭤상(張作相)에 의해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자 총본사를 발해의 옛 도읍터였던 동경성(東京城)으로 이전,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대종교서적간행회를 발족시켜 『삼일신고』, 『종지강연』 등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천전(天殿) 건립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란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ref>《종교학대사전》, 대종교, 한국사전연구사(1998년)</ref>
 
== 가경절 ==
[[1916년]] 음력 8월 1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나철은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나철 유언대로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후 [[대종교]]에서는 나철이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절(四大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 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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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보기 ==
* [[대종교]]
* [[김교헌]]
* [[윤세복]]
* [[신단실기]]
* [[삼일신고]]
 
== 주석 ==
<references/>
 
== 참고 문헌자료 ==
* 『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대종교총본사(1971년)
*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박성수 저, 북캠프(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