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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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의 정책 서적인 염철론에선 이 사건이 연이 동호를 습격하여 바깥으로 1000리를 물러나게 했으며, 요동을 지나 동쪽으로 조선을 공략하였다(鹽鐵論 卷 8 伐攻篇)고 표현했다. 같은 사건이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위략(魏略)을 인용해 고조선과 연나라의 갈등으로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취했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지만 고조선이 약화돼 있었다고 기록했다(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裏,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 三國志 卷30 魏書30).
 
즉, <삼국지> ‘위서동이전’이 인용한 <위략>을 보더라도 ‘연나라 장군 진개를 파견해 조선의 서쪽 지역을 침공해 2,000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는 구절에서 평안남도 전체를 합쳐도 2,000리가 안 되기 때문에 서쪽 2,000리를 상실하고도 요동현의 속현을 국경으로 삼았다면 고조선의 영역은 대동강 유역에 결코 국한될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ref>[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0268 “요나라는 고조선 옛 땅서 유래, 8조범금 전통도 지켜”] 중앙일보(2011.01.16) 기사 참조</ref>
 
또한 <사기> ‘진시황본기’26년조에는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영토가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조선에 미쳤다’고 하였고 진나라와 조선이 국경을 접한 지역을 [[요동]]이라고 말하고 있지만있어 당시 [[요동]]은 현재의 요동과 다르다며 다음의 내용을 제시한다.
 
{{인용문|<[[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삼국지> ‘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요동으로부터 동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