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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土亭秘訣)은 조선 중기의 학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지은 도참서(圖讖書)로 신수 석중결 또는 석중결(石中訣) 이라 고도 불린다. 개인의 사주(四柱) 중 태어난 연·월·일 세 가지로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이용하여 일년 동안의 신수를 열두 달별로 알아보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ref name="이지함">《한국세시풍속사전》, 토정비결(土亭秘訣), 국립민속박물관</ref>
 
== 전해지는토정 이야기이지함 ==
본관은 한산(韓山), 자 형백(馨伯)·형중(馨仲), 호 수산(水山)·토정(土亭), 시호 문강(文康), 《토정비결(土亭 訣)》의 저자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우다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갔다.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6품직을 제수3)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다음 해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ref>《문화원형백과》, 토정비결과 한국인(토정 이지함), 한국콘텐츠진흥원(2002년)</ref>
 
《토정비결》은 의약·점·천문·지리·음양·술서 등에 모두 능했으면서도, 흙담집에서 생활하는 등 가난한 생활을 즐기고 기이한 행동을 하는 등 많은 일화를 남겨 기인이라고 일컬어졌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인종 1)~78(선조 11))이 조선 명종 때 만든 비결(秘訣)의 하나로 중국에서 유행하던 여러 가지 술서(術書)를 인용해 엮었다.
 
나이·출생 월·일·시를 숫자로 따지고 주역의 음양설에 근거해 1년의 신수를 보며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비결은 신라말 도선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토정비결》이 민간에 널리 보급된 것은 대체로 조선 말기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정초에 거리에서 《토정비결》로 1년의 신수를 점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ref>《한국고중세사사전》, 토정비결(土亭秘訣), 가람기획(2007년)</ref>
 
=== 전해지는 이야기 ===
[[조선 선조]] 11년 「7월」조에 쓰여진 율곡 [[이이]]의 『경연 일기』에는 토정 [[이지함]]에 대한 인물평이 실려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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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신(臣)은 세 분의 스승을 섬겼는데, 이지함, 이이, 성혼이 그분들입니다. 세 분이 성취한 덕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 마음을 맑게 하고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지 않아, 지극한 행적이 세상의 규범이 된 점만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 성인과 현인 그리고 큰 선비들은 모두 마음을 맑게 하고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지 않은 일을 도리의 요체로 삼았습니다. 마음이 탁하면 근본이 썩고, 사사로운 욕심이 앞서면 사물에 얽매여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람이 겉을 억지로 아름답게 꾸미고 스스로 착한 척하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이 나날이 마음속 가득 쌓여 끝내 본성을 잃고 욕망에 빠지게 됩니다."}}
 
=== 토정 이지함 ===
본관은 한산(韓山), 자 형백(馨伯)·형중(馨仲), 호 수산(水山)·토정(土亭), 시호 문강(文康), 《토정비결(土亭 訣)》의 저자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우다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갔다.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6품직을 제수3)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다음 해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ref>《문화원형백과》, 토정비결과 한국인(토정 이지함), 한국콘텐츠진흥원(2002년)</ref>
 
《토정비결》은 의약·점·천문·지리·음양·술서 등에 모두 능했으면서도, 흙담집에서 생활하는 등 가난한 생활을 즐기고 기이한 행동을 하는 등 많은 일화를 남겨 기인이라고 일컬어졌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인종 1)~78(선조 11))이 조선 명종 때 만든 비결(秘訣)의 하나로 중국에서 유행하던 여러 가지 술서(術書)를 인용해 엮었다.
 
나이·출생 월·일·시를 숫자로 따지고 주역의 음양설에 근거해 1년의 신수를 보며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비결은 신라말 도선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토정비결》이 민간에 널리 보급된 것은 대체로 조선 말기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정초에 거리에서 《토정비결》로 1년의 신수를 점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ref>《한국고중세사사전》, 토정비결(土亭秘訣), 가람기획(2007년)</ref>
 
== 이지함의 주요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