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구계획: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잔글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복어 계획'''({{ja-y|河豚計画|ふぐけいかく}}, {{llang|en|Fugu Plan, Jewish settlement in the Japanese Empire}}) 또는 '''육족공화'''이란 [[1930년대]]에 [[일본]]에서 추진된 [[유대인]] [[난민]]을 [[만주국]]으로 이주시키려던 계획이다.[[1934년]]에 [[아유카와 요시스케]]가 처음 제안한 계획에서 시작되어 [[1938년]]의 [[5부장관 회의]]에서 정부의 방침으로 정해졌다. 육군 대좌 [[야스에 노리히로]], 해군 대좌 [[이누즈카 고레시게]] 등이 실무를 주도하였다.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이탈한 유대인들을 만주국에 정착시켜 자치구를 건설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유대인 적대정책을 추진해가던 [[나치 독일]]과의 우호관계 손상을 우려하여 계획이 점차 흐지부지되었으며, [[삼국 동맹 조약|삼국 군사 동맹]]의 결성,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양국이 [[연합국]]과의 전쟁을 개시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사라져 결국 계획은 무산되었다.
 
== 명칭의 유래 ==
복어 계획이란 이름은 1938년 7월에 이누즈카 고레시게의 연설에서 유래한다. 유대인의 경제력과 정치력을 높이 평가한 이누즈카는 유대인의 유치가 일본으로서 매우 득이 되는 일이긴 하나, 자칫 잘못하면 거대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누즈마는 이 이면성을 고급요리이나 맹독을 가진 [[복어]]에 빗대어 이것(유대인 이주 계획)은 복어 요리와 같다고 발언하였다. 후에 일본통으로 알려진 [[미국인]]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가 이 계획에 대한 연구서를 집필하면서 이 비유를 빌려 복어 계획(Fugu Plan)이란 명칭을 붙이면서 명칭이 정착되었다. 단, 이 명칭은 당시에도 비공식적으로만 사용되었다고 한다.
 
== 계획 ==
[[파일:Manchuria.jpg|thumb|180px|right|만주국 전도]]
복어 계획의 핵심은 수천에서 수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만주국으로 정착케 하여, 유대인의 자본을 만주국 건설에 사용하고, 아울러 일본 본국에 대한 자본유입을 실현하도록 미국(특히 유대계 미국인)을 설득하는 데 있었다.
29번째 줄:
정부의 핵심지도층에서도, 유대인의 경제력이나 정치력, 및 디아스포라에 의한 국제적 정보망을 과대 평가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에서 박해 받고 있는 유대인을 구출하는 것으로 일본에 대한 재미 유대인으로부터의 확실하고 영속적인 호의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유대 전문가 ==
[[파일:Lenin.WWI.JPG|thumb|180 px|right|안 데 밀·Lenin. 그가 주도한 러시아 혁명은 유대 음모론과 연결지어졌다.]]
[[1918년]]에 일본은 [[러시아 혁명]]의 진압을 위해 [[시베리아 침공]]을 실시하고,[[적군]]과 적대하고 있던 [[백군]]을 지원했다. 10만명의 병력과 9억엔의 전비를 투입했지만, 3천명의 사망자를 냈을 뿐, 눈에 띈 성과도 없이 1922년에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47번째 줄:
 
 
== 극동 유대인 대회 ==
[[1937년]] 야스에는 하얼빈에서 현지의 유대인 지도자 아브라함 카우프만(Abraham Kaufman) 등과 회담하고, "일본인은 불공정한 재판에 대하여 반성했다."라고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동년 12월 26일, 제1회 극동 유대인 대회가 요제프 카스페 소유의 모데룬 호텔에서 열렸다. 관동군의 인가 아래, 3일간의 예정으로 개최된 이 대회에서, 육군은 야스에를 비롯하여 당시 하얼빈 육군 특무 기관장을 맡고 있던 육군 소장 [[히구치 기이치로]] 등을 파견했다. 이 자리에서 히구치는 독일의 반유대 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하여, 참석한 유대인들로부터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이 사실을 안 독일 외상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주일 독일 대사를 통해 강력히 항의했지만, 상사에 해당되는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가 히구치를 옹호했기 때문에, 독일측도 그 이상의 강경한 태도는 보이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54번째 줄:
또 하얼빈에서 유대인 자치구 건설에 관한 구상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제2회, 제3회 극동 유대인 대회가 개최되었다.
 
== 유대인 대책 요강 ==
 
일본 정부는 대 유대인 정책에 관한 일련의 지침을 [[1938년]] 12월에 개최된 [[5상 회의]]에서 논의했다.
70번째 줄:
이렇듯 정부는 계획의 진행을 일단 허가했지만, [[1936년]]에 [[독-일 방공 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독일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할 행위는 특별히 실시하지 않았다.
 
== 오산 ==
이후 몇 년간 계획자들과 유대인 커뮤니티의 멤버들이 참가한 회의가 빈번히 이루어졌으나 계획은 더 이상 제도적 수단에 의하여 진척되지 않았다. [[1939년]]에는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지원 분산을 염려한 상하이의 유대인이 상하이로의 유대 난민 유입을 더 이상 허가하지 않게 당국에 요구하였다.
극동 유대인 회의 의장이었던 카우프만은 기자를 통해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풀도록 미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측근인 세계 유대인 회의 의장 [[스티븐 사뮤엘 와이즈]]는 유대-일본간의 어떤 협력도 비애국적 행위라는 강한 견해를 나타냈다(미국이 일본에 대해 실시한 통상 금지 조치의 위반에 해당하기 때문에). [[1940년]]에는 재미 유대인 유력자와의 사이에 연줄을 가지는 MIT출신의 재미파견직원인 타무라 히카루가 복어 계획에 대하여 설명 했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 좌절 ==
[[1939년]]에 소련이 독일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유럽의 유대인을 소련 경유로 일본에 이송하려는 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같은 해,[[제2차 세계 대전]]의 발단이 되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었다. 폴란드의 유대인은 피신하여 그 일부는 이웃나라 [[리투아니아]]로 대피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40년]] 8월에 소련은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 3국]]을 차례로 병합 했고, 이에 따라 탈출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99번째 줄:
이후 전쟁 끝무렵까지 유대 난민의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으며, 유대인 지도자 가운데는 형무소에 보내진 사람도 있었다. 또, 많은 유대인이 굶주림에 시달렸고, 시내의 무선기 파괴를 목표로 하는 연합군 공격기에 의해 종전을 몇달 앞두고 게토가 폭격을 당하는 등 갖가지 시련을 겪었으나, 마침내 나치독일의 패망과 해방을 맞았다.
 
== 의의 ==
야스에, 이누즈카 등에 의해서 구상된 복어 계획은 실패한 계획이었다. 일본(혹은 일본 점령하의 중국)으로 이주할 수 있던 유대인은 그 수가 많지 않았으며, 비자를 신청해도, 도항할 수 있던 사람은 극소수였다. 또, 고베나 상하이에 이주한 유대인은 문자 그대로 몸 만 달랑 일본에 온, 굶주리고 불결한 난민에 불과했다. 야스에나 이누즈카가 기대하고 있었던, 유복하고 자비 깊은 미국인 은행가나 기업의 지도자 등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로부터 일본에의 호의나 원조를 얻어낼 영향력 등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