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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형성 ==
박두을은 호암이 [[일본]] [[와세다대]] 유학 중인 [[1929년]] [[12월 2일]] 맏딸 인희(현재 한솔그룹 고문)를 낳은 데 이어 2년 터울로 맹희, 창희, 차녀 숙희를 낳고 이어 3녀 순희, 3남 건희, 4녀 명희를 차례로 순산해 슬하에 모두 3남4녀를 둔 어머니가 되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간다면, 호암자전에서 호암은 자신의 자녀수를 4남5녀라고 적시했다. 이 중 박 여사 소생은 3남4녀이고, 일본인 아내와의아내(구라다 상)와의 사이에 1남1녀를1남1녀(태휘, 뒀다.일본명 이에야스테루)와 대해서는혜자를 후술하기로 한다뒀다.)
 
의령부잣집 막내아들에게 시집와 아들 딸 잘 놓고 별 어려움 없이 살던 박 여사에게 생애 최초 시련이 닥쳤다. 남편이 대학을 중퇴하더니 무위도식하며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낸 것이다. 호암의 [[와세다대]] 중퇴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1학년 2학기 말 심한 각기병에 걸린 것이다. 2학년이 되자 휴학원을 내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결국 학교를 단념하고 사전에 아무 연락도 없이 귀향했다.
 
고향에서 쉬면서 곧 건강을 회복했지만 이번에는 할 일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호암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친구들과 노름에 빠졌다. 노름은 늘 한밤중까지 계속되었고 지칠 대로 지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 무렵 호암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운이 없는 것일까, 세상이 나쁜 것일까? 자성과 자제를 잃은 무위도식의 나날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날도 골패노름을 하다가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26세의 그는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평화롭게 잠든 아이들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스쳤다. 자신이 그동안 너무 허송세월을 했다는 자책이 컸다. ‘뜻을 세워야 한다. 독립운동도 좋고 관리가 되어도 좋고 사업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을 빈곤에서 구하는 일이 시급하다.’ 호암은 사업에 인생을 걸어보자고 결심한다. 훗날 호암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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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손자 : [[정용진]]
**** 외손녀 : 정유경
 
** 일본댁 : 구라다 상
*** 일남 : 태휘, 일본명 야스테루
*** 일녀 : 혜자
 
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