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황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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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후 여씨'''(高皇后 呂氏, ? ~ [[기원전 180년]])는 [[전한 고조]]의 황후이며 [[전한 혜제]]의 어머니이다. 명은 치(雉). 자는 아후(娥姁). 시호는 고황후(高皇后)였지만, 나중에
== 황후가 될 때까지 ==
현 [[산둥 성]]인 단부의 유력자인 [[여선왕|여공]]의 딸로 태어났다. 성인이 된 후에 당시 패현 사수의 정장이던 유방에게 시집 가고 여동생인 여수(呂須)는 [[번쾌]](樊噲)에게 시집 갔다. 일남일녀([[전한 혜제|혜제]]·[[노원공주]])를 얻었다. [[진나라|진(秦)]] 말 혼란기 초한전이 발발한 직후에는 패현에서 시아버지인 유태공이나 아이들과 같이 남편이 없는 집을 지키고 시아버지와 농사를 도와 아이들을 키웠지만, 초한전이 격화하여 팽성 전투에서 유방이 [[항우]]에게 생포된 탓에 여치는 시아버지인 유태공과 같이 초 진영에 인질로 잡혔렸지만, 혜제와 노 원공주는 우여곡절 끝에 유방과 합류하여 관중으로 도망하는 때 유방이 항우 군대에 추격에서 안전히 벗어나고자 혜제와 노 원공주를 버리려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초한전은 유방의 지배하에 있던 [[한신 (회음후)|한신]]에 의거한 초 진영에 모인 각국을 대상으로 한 와해 공작과 평정, 태공과 여치의 신병 해방이 초점화 하였고 항우 측이 유리하면서도 교착 상태에 빠졌지만, 기원전 203년에 들어서서는 한신에 의거한 와해 공작이 성공하여 형세는 역전되었다. 궁지에 빠진 항우는 유방과 강화하였고 여치는 태공과 함께 유방 곁으로 복귀하였다.
익년인 기원전 이백이 년, 유방은 항우를 멸망하게 하고 한조를 열어 황제
== 여치의 전횡 ==
고조가 죽고 혜제 유영이 즉위하면서 여치는 황태후로 그 후견을 맡았지만, 고조의 후계자를 둘러싼 다툼은 뿌리 깊어서 혜제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치는 초왕 유여의를 독살하고 유여의의 모비인 [[척부인]]의 손과 다리를 자르고 눈을 도려내었으며 약을 이용하여 귀를 멀게 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없애고서 변소에 두어 '인간 돼지'라고 부르게 했다고 『[[사기|史記]]』에 적혀 있다.
이 일에 충격받은 [[혜제]]는 정무를 방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자, 여치는 그 아들인 [[전한 소제 (3대)|소제]]을 황제로 옹립하고 태황태후가 되었다. 친정인 여씨 일족과 진평, 주발을 위시한 [[한나라|漢]] 건국공신에게 협력받아 정치상 안정을 꾀했지만, 이때부터 각지에서 제후로 봉해져 있던 유방의 서자들을 차례로 살해하여 그 뒤에 자신의 조카를 위시해 여씨 일족을 봉하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전한 소제
== 평가 ==
여치가 전횡하던 시대에는 황족이나 공신들이 살해당하는 등 정계에서는 피를 부르는 사건이 계속되었던 시대였지만, 여치가 대외 원정을 위시한 대사업을 극력 줄여 국민생활안정에 진력했므로, 시정은 매우 평화롭고 안정되었다. 특히 원정하느라고 고조가 부재한 사이에 건국공신이자 고조의 충복인 한신이 반란을 획책했다고 누명을 씌워서 허리를 끊어 살해한 일은, 천하가 재분열되어 전쟁하는 일을 막게 되어 그 공적은 크다. 후의 문제와 경제에 의한 문경의 치와 무제 시대의 대원정을 필두로 하는 대사업의 정치상·경제상 기초는 이 시대에 만들어진 데다가 새롭게 후한에 걸친 동란 때 적미의 군대는 전한 황제들의 묘를 도굴하여 안치되었던 여치의 사체를 훼손하였다. 광무제는 여치에게서 황후 지위와 시호인 고황후 칭호를 박탈하고 문제의 생모인 [[효문태후|박
[[분류:생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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