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칼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7번째 줄:
== 생애 및 활동 ==
=== 초기 활동 ===
[[
[[1937년]] 부모의 이혼 이후 어머니와 함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아테네 음악원 재학 중 어머니와도 교류를 끊고, 데뷔 전까지 아르바이트 및 친언니가 주는 생활비로 생활하였다.
어려서는 뚱뚱한 체구로 한때 그리스에 체류 중 [[폭식증]]에 걸리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오페라극의 소프라노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 하여 그는 청소년기 무렵 30kg의 체중을 감량하였다. 또한 근시가 심해 두꺼운 안경을 착용하기도 했다. 1929년경부터 음악공부를 시작하였다.
=== 수학과 데뷔 ===
[[File:Maria Callas.1.JPG|thumb|130px|국립 아테네 음악원 당시의 지도교수 엘비라 데 히다르고와 함께 ([[1954년]])]]
[[1937년]] [[아테네]]의 [[그리스]] 국립 [[아테네 음악원]]에 입학하기 위해
1938년 [[아테네]]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의 산투차 역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50여 편의 넘는 오페라, 가곡의 배역을 맡았고 20편 이상의 오페라 전곡을 음반으로 녹음했다.
이어 《[[보카치오]] (Boccaccio)》에 출연하였고, [[1945년]] [[미국]]으로 돌아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응모하였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그해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1947년에 베로나 음악제에서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 (La Gioconda)》의 타이틀 롤을 불렀고,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라 조콘다]]》를 불러 [[이탈리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때 이탈리아인들이 일부 소프라노 등에게 붙이는 "라 디비나 (오페라의 성자)"라는 별칭을 받기도 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나 별 인상을 남기지 못해 주목받지 못하다가, [[1947년]] [[12월]] [[이탈리아어]]로 상영되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역에 캐스팅되고, 바로 [[자코모 푸치니]]의 [[투란도트]]의 타이틀롤로 주목을 받아 재계약을 맺게 되었다.▼
▲이어 《[[보카치오]] (Boccaccio)》에 출연하였고, [[1945년]] [[미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그 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응모하였으나 주목받지
[[1947년]] 자신의 팬이자 열렬한 후원자였던 28년 연상의 매네기기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1957년]] 선박왕 오나시스를 만나면서 먼저 이혼을 요구하여 이혼하였다.
=== 오페라 가수 생활 ===
줄 22 ⟶ 30:
[[1965년]] [[7월]] [[영국]]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상영된 [[토스카]]의 주연 토스카 역을 맡아보았고, [[1965년]]부터는 오페라 연출, 연기지도 등도 맡아보았다. [[1970년]]에는 영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파졸리니의 영화 《메데아 Medea》에 출연하였다.
===
[[File:CallasAmsterdam1973a.jpg|thumb|left|140px|[[1973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순회공연]]
한때 이탈리아 부호 메네기니와 결혼하였으나 남편 메네기기와 함께 참석한 한 연회장에서 [[아리스토텔리스 오나시스|오나시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칼라스는 먼저 메네기니와 이혼을 요구, 이혼 후 오나시스와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오나시스는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하였고, 이 무렵 아기를 유산하였다. 칼라스는 [[1965년]] 코벤트 가든에서의 '토스카'의 주연 토스카역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칼라스는 먼저 메네기니와 이혼을 요구, 이혼 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 오나시스와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오나시스는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하였고, 이 무렵 아기를 유산하였다. 칼라스는 [[1965년]] 코벤트 가든에서의 '토스카'의 주연 토스카역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미국]] 국적을 다시 회복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은둔하였다.
[[1971년]] 영화 [[메데아]]에 다시 캐스팅되었다. [[1971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줄리어드 음악 스쿨의 교수로 특별 초청되어 오페라, 성악을 지도하렸고, 마스터클래스 실기교실의 교수로 초빙되어 특별 강의를 열기도 했다. 1972년부터 1973년 미국과 유럽 순회 공연을 다녀왔다. 1973년의 극동 공연때는 디 스테파노와 리사이틀을 열었다. 말년에는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프랑스]] [[파리 시]]에서 은둔하다, 1977년 우울증 약물 및 [[수면제]] 과다복용 등으로 인한 쇼크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시신은 화장되어 [[에게 해]]에 뿌려졌다.▼
▲[[1971년]] 영화 [[메데아]]에 다시 캐스팅되었다. [[1971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줄리어드 음악 스쿨의 교수로 특별 초청되어 오페라, 성악을 지도하렸고, 마스터클래스 실기교실의 교수로 초빙되어 특별 강의를 열기도 했다. 1972년부터 1973년 미국과 유럽 순회 공연을 다녀왔다. 1973년의 극동 공연때는 디 스테파노와 리사이틀을 열었다.
=== 생애 후반 ===
[[1974년]] [[10월]] [[한국]]을 방문, [[서울특별시]]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카르멘과 라 조콘다, 메피스토펠레스, 쟈니 스키니, 라 보엠, 토스카 등의 타이틀롤을 선보이고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1월]] [[일본]] [[도쿄]]를 방문, [[삿포로]]에서도 토스카 등을 선보였다.
말년에는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프랑스]] [[파리 시]]의 아파트에서 은둔하다, 1977년 우울증 약물 및 [[수면제]] 과다복용 등으로 인한 쇼크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시신은 화장되어 [[에게 해]]에 뿌려졌다.
=== 사후 ===
로만 폴란스키에 의해 그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마스터 클래스가 상영되었다. [[2002년]] [[이탈리아]]에서 마리아 칼라스 사망 25주년을 기념하여 영화 [[칼라스 포에버]]가 제작, 상영되었다. 영화는 칼라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탈리아]]인 [[프랑코 제피렐리]]가 맡았으며, 음악감독 유진 콘은 [[1970년]] 이후 3년간 칼라스의 공연에 동행하며 [[피아노]] 연주자를 하였다. 또한 스태프 겸 메이크업 감독으로 참여한 닐로 자코포니는 1970년과 71년 마리아 칼라스가 출연한 영화 메데아의 스태프였다. [[프랑코 제피렐리]]는 마리아 칼라스 관련 영화 상영 제의를 받았으나 주로 칼라스의 사생활에 대한 내용이었으므로 대부분 거절하였다.
[[2007년]] [[그리스]]에서는 마리아 칼라스의 해로 지정하고 사망 30주년을 기념하여 국가적 기념행사를 개최했고, 독일,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일본, 한국 등에서도 그의 소추모제가 산발적으로 열렸다.
== 평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