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칼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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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보카치오]] (Boccaccio)》에 출연하였고, [[1945년]] [[미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그 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응모하였으나 주목받지 못하였고, 95kg의 거구가 지적받자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하여 감량에 성공한다. 그해 칼라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1947년에 베로나 음악제에서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 (La Gioconda)》의 타이틀 롤을 불렀고,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라 조콘다]]》를 불러 [[이탈리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때 이탈리아인들이 일부 소프라노 등에게 붙이는 "라 디비나 (오페라의 성자)"라는 별칭을 받기도 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나 별 인상을 남기지 못해 주목받지 못하다가, [[1947년]] [[12월]] [[이탈리아어]]로 상영되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역에 캐스팅되고, 바로 [[자코모 푸치니]]의 [[투란도트]]의 타이틀롤로 주목을 받아 재계약을 맺게 되었다.
 
한때 연극, 영화감독이었던 [[루치노 비스콘티]]와 사랑에 빠졌으나 곧 결별하였다. [[1946년]] [[지오반니 바티스타 매네기기]](Giovanni Battista Meneghini)를 만나고, [[1947년]] 자신의 팬이자 열렬한 후원자였던 28년 연상의 매네기기와 결혼하였다. 지오반니 매네기기는 그의 음반과 각종 활동비용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1957년]] 선박왕 오나시스를 만나면서 먼저 이혼을 요구하여 이혼하였다.

결혼식 직후 친정어머니 에반겔리아는 내 딸 칼라스라는 책을 내 그를 인신공격하였다. 또한 방송에 출연한 에반겔리아는 "마리아같은 여자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그리스에서의 데뷔를 포기한 칼라스는 미국, 이탈리아에서 데뷔를 시도한다. 이후 그는 마리아 메네기기 칼라스(Maria Meneghini Callas)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이혼 후 다시 마리아 칼라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 오페라 가수 생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