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숭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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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
 
“개인 숭배”라는 용어는 1800년에서 1850년경에 [[영어]]권에서 [[독일어]]권과 [[프랑스어]]권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다. <ref>[http://books.google.co.kr/books?id=CreuLAI0c9sC&pg=PA25&redir_esc=y]</ref>처음에는 [[낭만주의]] 시대때 ''“천재에 대한 추종”''이란 용어로 쓰였고 정치적인 뜻은 포함되지 않았다. 1877년에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최초로 정치적인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때 “개인 숭배”라는 말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배경==
 
[[파일:Cin Shihhuang Shaanxi statue.jpg|250px|섬네일|오른쪽|[[진 시황제]] 동상]]
역사 속에서, 거의 모든 [[군주]]와 [[국가 원수]]들은 엄청난 규모의 숭배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왕권신수설]]에 따르면 군주의 정권은 신에 의해 부여받았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 [[일본]], [[잉카 제국]], [[아즈텍 제국]], [[티베트]], [[시암]], [[로마 제국]]과 같은 제국들은 특히 군주를 신격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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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개인 숭배 현상은 [[전체주의]] 정권이 급진적인 사상에 따라 사회를 변혁하려고 할 때 만들어진다. <ref>[http://www.historyguide.org/europe/cult.html]</ref>때때로 혁명적인 변혁을 주도시킨 지도자가 자신이 없으면 국가의 밝은 미래는 오지 않는, 국가의 “자애로운 지도자”로 다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개인 숭배 현상은 20세기에 일어난 [[아돌프 히틀러]]나 [[베니토 무솔리니]], [[이오시프 스탈린]]과 같은 전체주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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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의 최초의 [[공산주의]] 지도자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는 혁명 성공 이후 정당과 정부 회담, 대중 매체에서 ''“위대한 지도자”'', ''“동쪽의 별”'', ''“위대한 사상가"''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러나 [[소련]]의 지원이 중단되고 난 뒤에 타라키 정권은 붕괴되었다.
 
===알바니아===
 
[[알바니아]]의 장기 집권한 [[엔베르 호자]]의 경우 스탈린과 마오쩌둥과 비슷한 방식의 개인 숭배를 벌였다. 호자는 사실상 정치, 경제, 사회, 군사 쪽의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천재라고 묘사되었다. 각 도시마다 동상들이 세워지고 교과서에는 그가 말한 어록들이 포함되었다. [[알바니아 노동당]] 집권 시기에는 호자를 ''“자애로운 동지”'', ''“유일한 지도자”'', ''“위대한 교사”''라는 이름으로 극찬했다.
 
===아르헨티나===
 
[[파일:Juan Domingo Perón 1.jpg|150px|섬네일|오른쪽|아르헨티나 [[로사리오 (아르헨티나)|로사리오]]시의 페론 흉상]]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페론]]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았고 현재에도 아르헨티나 [[정의당 (아르헨티나)|정의당]]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페론의 추종자들은 페론이 가난을 척결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했다고 추앙했지만, 반대파들은 그를 [[데마고기|선동가]]라고 주장하며 [[독재자]]로 인식한다. 페론은 그들의 지지자인 [[페론주의]]자들을 규합하고 정권을 잡기 위해 그와 그의 아내에 대한 숭배 작업을 벌였다. <ref>Politics and Education in Argentina, 1946-1962, by Mónica Esti Rein; trans by Martha Grenzeback. Published by M. E. Sharpe, Armonk, NY/London, 1998, p. 79-80.</ref>
 
===아제르바이잔===
 
[[파일:GYD.jpg|150px|섬네일|왼쪽|그의 이름이 새겨진 [[헤이다르 알리예프 국제공항]].]]
[[헤이다르 알리예프]]의 개인 숭배 작업은 1993년 대통령 취임과 2003년에 그가 사망할 때 까지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와 사회의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그의 아들 [[일함 알리예프]]가 권력을 승계했다.<ref>[http://www.economist.com/node/354347]</ref><ref>[http://www.slate.com/articles/news_and_politics/dispatches/features/2008/travels_in_the_former_soviet_union/the_cult_of_heydar_aliyev.html]</ref> 알리예프는 구 소련의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회원과 1967년부터 1987년까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도자로 있었고 1993년에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되었다. 취임 후 가족과 정당 회원, 석유 수입과 후원을 기반으로 독재 권력을 구축했고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알리예프를 '''“아제르바이잔의 아버지”''라고 찬양했다.<ref>[http://books.google.co.kr/books?id=dt2TXexiKTgC&pg=PA16&lpg=PA16&dq=cult+of+personality+aliyev&source=bl&ots=f1KfZuKO07&sig=FPoFfGos1YKQB0wd7wqNVoyqEsk&hl=en&sa=X&ei=sr9nUOT1H8WP0QHFp4DICA]</ref>
 
===중국===
 
[[파일:Chiang KaiShek Portrait Tiananmen Beijing.jpg|200px|섬네일|오른쪽|[[천안문]]의 장제스 사진이 걸린 모습]]
[[중화민국]]시절의 개인 숭배는 [[중국 국민당]]의 설립자인 [[쑨원]]에 집중되어있다. 쑨원 사후 개인 숭배는 [[장제스]]에게 집중되었으며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피신할때도 개인 숭배가 시행되었다. 보통 ''“장공{蔣公}”''으로 많이 불렸으며 그의 얼굴이 새겨진 인쇄물들은 [[태두]]에 부착되었다. 교과서와 노래로 장제스를 찬양하는 것들은 1987년 민주화될 때 까지 흔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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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카 공화국===
 
[[파일:Era de Trujillo sign.jpg|150px|섬네일|왼쪽|트루히요를 찬양하는 어록]]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의 30년간 장기독재 기간에는 개인 숭배로 인한 트루히요 찬양 기념비가 전국에 설치되었다. 그의 친위 내각은 수도인 [[산토도밍고]]를 ''“트루히요 시(Cuidad Trujillo)"''로 개정하고, [[산 크리스토발]]주를 ''”트루히요 주“'', 가장 높은 봉우리인 [[두아르테 산]]을 ''”트루히요 산(Pico Trujillo)"''으로 개정한 것에 대해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졌다. “엘 제페”라는 그를 기리는 동상은 도미니카 전국에 세워졌으며 다리와 공공기관에 그의 명예를 기리는 문구가 새겨졌다. 국영 신문은 앞면에 그를 찬양하는 문구들을 새겼으며, 자동차 번호판에는 ''“트루히요 만세!”''나 ''“국가의 후원자(트루히요)의 해”''라는 문구들이 새겨졌다. 산토도밍고에는 ''“신과 트루히요(Dios y Trujillo)"''라는 문구가 밤낮 구분 없이 항상 보일 수 있게 하는 전광판이 설치되었다. 심지어 교회에까지도 ''”천당에는 하느님, 지상에는 트루히요(Dios en cielo, Trujillo en tierra)“''라는 찬양구를 걸어야 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독재자와는 달리 국가 자체를 개인 소유의 땅으로 취급했으며 그의 가족들도 개인 숭배 대상에 지목되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였던 [[캄보디아]]의 학생들은 1940년대 초반 제독인 [[필리프 페탱]]을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지도자, 영광스러운 그의 이름... 악마로부터의 수호자”''라는 문구로 시작하며 기도를 드려야 했다. <ref>[Short, Philip. Pol Pot: Anatomy of a Nightmare. New York: Henry Holt and Company. 2005.]</ref>
 
===나치 독일===
 
[[나치 독일의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대중 선전에서 그 스스로를 ''“독일인의 최고 심판, 독일 제국의 일등 병사, 신독일의 일등 노동꾼, 영원한 최고 군 사령관, 유럽의 최고 군 지도자, 신성한 산의 신성한 수호자”''로 이름을 붙였다. 당시의 대중 문화는 히틀러를 두드러지게 표현했으며 히틀러를 독일인들에게 존경받고 사랑을 받는 신과 같은 형체로 묘사되었다.
 
===아이티===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그 스스로를 우상화하고 자신을 국가의 화신으로 비유했다. 아이티 전통 [[부두교]]를 부활시키고 나중에 그 스스로를 부두교의 [[성직자]]로 주장하여 자신의 권력을 굳혔다. 자신의 우상화를 더욱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부두교의 죽음의 화신인 “바론 사메디”에 비유했다. 화신의 형태를 하기 위해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를 사용한 것이 유명하다. 뒤발리에 정권은 그를 ''“국가의 아버지”''라고 선전했고 심지어는 그를 “파파 독(Papa Doc)”이라고 부르며 신격화시켰다.
 
===이라크===
 
[[파일:SaddamHusseinBronzeskulpturen.jpg|250px|섬네일|오른쪽|[[사담 후세인]] 사후 남겨진 그의 동상]]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독재 권력 구축의 결과로 후세인 숭배 현상은 이라크 사회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 이라크 전역에 걸쳐서 그의 그림, 포스터, 두상, 벽화가 건립되고 그려졌으며 학교나 공공 장소, 공항, 학교, 백화점 벽면, 그리고 이라크 화폐에 그의 얼굴이 새겨졌다. 후세인의 개인 숭배는 이라크 사회에 있는 다양한 집단들을 결속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후세인은 [[베두인]]복장이나 [[쿠르드족]] 전통 의상, 서구식 양복과 같이 복장이 다양했는데, 베두인족과 쿠르드인의 통합, 현대적인 지도자로 보이기 위한 장치였다. 또한 그를 예복을 갖추고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독실한 [[무슬림]]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국제 공항, 대학, 다리, 댐, 경기장, 문화 센터, 거리, 도시 구획지, 로켓과 같은 물체들에 사담의 이름이 새겨졌다. 후세인은 개인용 궁전에 황금 수세식 변기도 사용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국가 지도자들이 그에게 선물한 물품들은 그의 궁전에 전시되었다. 또한 네부카드네자르 궁전과 같이 현대에 재건축된 고대 유품들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지도록 명령했다. 그가 쓴 전기와 문학은 지식을 측정하기 위해서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배워야 했다. 수많은 문학, 음악, 과학적 지식과 찬양 문구들은 그에게 바쳐졌으며 국영 방송사는 화면 구석에 [[모스크]]와 함께 그의 얼굴이 들어갔다. 하지만 몰락 이후 그의 동상들과 기념비는 모두 파괴되었고 우상 숭배들도 모두 해제되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통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그의 통치 아래에 많은 우상화 작업을 벌였다. 우상화 작업은 ''“무솔리니의 말은 언제나 옳다”''로 시작했다. 비록 그가 르네상스 인, 군, 가족으로도 그려졌지만, 대개 그는 [[마초]]로 표현되었고, 모든 것에 능통한 만능인으로도 보여졌다묘사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당시에 죽음을 이겨낸 것과 암살시도의 미수 신화는 독재자인 그를 신비롭고 불멸의 존재로 그려내었다. 게다가 매체들은 무솔리니를 신에게 선택받았는 것으로 묘사했고, 그를 전능하고 신과 같은 초인처럼 그려내었다. 매체에서 그는 이탈리아인을 지적으로,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한층 끌어올렸다고 주장했다. 권력을 잡기 전부터 그를 찬양하는 노래가 존재했으며, [[에티오피아]] 침공은 무솔리니의 야망인 [[로마 제국]] 부활이 그 목적이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통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그의 통치 아래에 많은 우상화 작업을 벌였다. 우상화 작업은 ''“무솔리니의 말은 언제나 옳다”''로 시작했다. 비록 그가 르네상스 인, 군, 가족으로도 그려졌지만, 대개 그는 [[마초]]로 표현되었고, 모든 것에 능통한 만능인으로도 보여졌다. [[제 1차 세계 대전]]당시에 죽음을 이겨낸 것과 암살시도의 미수 신화는 독재자인 그를 신비롭고 불멸의 존재로 그려내었다. 게다가 매체들은 무솔리니를 신에게 선택받았는 것으로 묘사했고, 그를 전능하고 신과 같은 초인처럼 그려내었다. 매체에서 그는 이탈리아인을 지적으로,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한층 끌어올렸다고 주장했다. 권력을 잡기 전부터 그를 찬양하는 노래가 존재했으며, [[에티오피아]] 침공은 무솔리니의 야망인 [[로마 제국]] 부활이 그 목적이었다.
 
이탈리아가 민주주의를 회복한 후에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같은 사람들이 2000년대에 들어서 자신이 장악한 언론을 통해 우상화 작업을 벌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ref>[http://www.repubblica.it/2009/06/sezioni/politica/berlusconi-varie-2/silvio-canzoni/silvio-canzoni.html]</ref> 그의 정당의 찬송가는 ''“베를루스코니에게 감사하자”''이다. 정당에서 그 자신을 자주 ''“예수”''에 비유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공공 여론에서는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의 새로운 정치적인 영향을 가져왔고, 정치가의 [[카리스마]]가 부각되었으며, 언론을 통한 우상 숭배가 시도되었음을 드러냈다. 그는 이전에 10년간 4번에 걸쳐서 [[이탈리아의 총리|총리]]직을 연임했다.
 
===리비아===
 
[[파일:Leptis magna museum.jpg|250px|섬네일|오른쪽|리비아 홈스에 위치한 [[렙티스 마그나 박물관]]에서의 그를 그린 모습.]]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리비아]] 시절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시절에 개인 숭배가 시행되었다. <ref>[Blundy & Lycett 1987, p. 20.]</ref>그의 얼굴은 여러 가지 물건, 포스터, 시계, 학생의 책가방에 까지 그려졌다. 그의 어록들이 담긴 [[그린북]]은 전국적으로 배포되었고 그의 어록들은 공항, 거리, 심지어 펜에까지 새겨졌다. 그 자신은 우상화를 원하지 않으나 리비아 국민들은 우상화를 원한다는 말까지도 했다. 리비아 전역에서 그의 지지자 무리들은 그에 대한 행사가 시행될 때 마다 그를 찬양하거나 관심을 끌기 위해 나타났다. 카다피는 특유의 길고 강렬한 연설을 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주로 [[미국]]이나 [[이스라엘]]을 비판했던 것이 주 내용이었다.<ref>[Kawczynski 2011, p. 191]</ref>
 
===말라위===
{{언제|30년간30년 간}} [[말라위]]를 통치했던 독재자 [[헤이스팅스 반다]]는 말라위 전역에 걸쳐서 광범위한 개인 숭배를 시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모든 사무용 건물 외벽에는 그의 초상화가 반드시 걸려있어야 하며, 시계나 그림, 포스터와 같은 다른 물건들이 그의 초상화 위에 거는 것을 금지했다. 영화 상영 시작 전에 찬송가가 울리기 전에 항상 반다에 관한 영상이 나왔다. 반다가 어떤 도시를 순방하면, 항상 도시의 대표 여성이 공항에서 그를 접대하고 그를 위해 공연을 벌였다. 대통령을 접대하기 위해 특별한 옷을 입고 공연을 해야 했다. 이전 정부에 세워졌던 교회 건물들은 모두 폐쇄되었다.
 
근 30년간 [[말라위]]를 통치했던 독재자 [[헤이스팅스 반다]]는 말라위 전역에 걸쳐서 광범위한 개인 숭배를 시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모든 사무용 건물 외벽에는 그의 초상화가 반드시 걸려있어야 하며, 시계나 그림, 포스터와 같은 다른 물건들이 그의 초상화 위에 거는 것을 금지했다. 영화 상영 시작 전에 찬송가가 울리기 전에 항상 반다에 관한 영상이 나왔다. 반다가 어떤 도시를 순방하면, 항상 도시의 대표 여성이 공항에서 그를 접대하고 그를 위해 공연을 벌였다. 대통령을 접대하기 위해 특별한 옷을 입고 공연을 해야 했다. 이전 정부에 세워졌던 교회 건물들은 모두 폐쇄되었다.
 
===북한===
 
[[파일:All hail Kim Jong Il.jpg|250px|섬네일|오른쪽|북한의 개인 숭배 현상의 일환인 [[아리랑 축제]]의 모습.]]
저널리스트 브래들리 마틴은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이 행한 개인 숭배를 보도했다. 1979년 그가 북한을 취재 당시에 거의 모든 음악, 미술, 조각에서 김일성을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했으며, 개인 숭배 현상은 그의 아들인 김정일에까지 확장되어, 그를 ''“친애하는 지도자”''로 추앙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기 자신이 개인 숭배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미국 종교의 자유 수사팀은 북한의 학생들이 개인 숭배의 일환으로 김일성을 감사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을 찾아냈다. <ref>[http://www.uscirf.gov/images/stories/pdf/nkwitnesses.pdf]</ref>김일성에 대한 추앙은 그가 죽은 1994년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김일성이 영원히 살기를 기념하는 ''“영생”''기념비가 전국적으로 건립되었고, 각 기념비마다 그의 생일이나 그가 죽은 일자에 모금활동을 하도록 되어있다.<ref>[http://www.dailynk.com/english/read.php?cataId=nk01500&num=6222]</ref> 2011년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에게도 숭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필리핀===
 
다른 국가들이 국가 지도자가 개인 숭배를 벌이는 것이라면, [[필리핀]]에서는 지역 정치인들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개인 숭배를 벌이기도 한다. 그들은 대중 매체에서 자주 ''“에팔 정치인''”으로 명명되는데, 이때 ''“에팔”''이란 필리핀 속어로 ''“관심을 끄는 사람”''의 뜻을 지닌다. 지역 정치인들은 정부 프로젝트 게시판에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걸며 자신의 이미지 향상을 한다.<ref>[http://www.philstar.com/headlines/763279/bishop-wants-anti-epal-bill-cover-politicians-holiday-greetings]</ref> <ref>[http://www.journal.com.ph/index.php/news/national/57283-luistro-has-no-problem-with-epal-politicians]</ref><ref>[https://ph.news.yahoo.com/blogs/the-inbox/posters-epal-politicians-ordered-removed-052148943.html]</ref>이러한 정치인 홍보가 심해지자 상원 법안 제 1967호, 혹은 반(反)에팔 법안으로 불리는 이 법안은 2011년 11월에 상원 미리암 산티아고가 정치인들의 에팔 행위를 근절하고자 제출했으며, 2013년에 다시 제출하였다.
 
===폴란드===
 
[[폴란드]]의 개인 숭배 현상은 폴란드의 군 사령관이자 정치인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전간기|1,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시작하여 그의 사후인 1935년에도 계속 지속되었고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2차 세계 대전 사이에 피우스트스키의 숭배 현상은 대중 매체에 의해 그를 정치적 선지자와 능숙한 전략가로 포장했다. 숭배 현상은 그의 업적인 1차 대전 후유증 기간의 폴란드 독립과 [[소련-폴란드 전쟁]], 수십년의 불경기 회복과 연관을 지었으며 특히 [[폴란드 인민 공화국|폴란드의 공산 정권]]때 그를 많이 찬양 하였다. 현재에도 피우스트스키는 폴란드 역사에서 많은 긍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폴란드의 독립기념일은 [[1차 세계 대전]]이후 그의 권력기반을 다진 11월 11일에 맞춰졌다.
 
===루마니아===
 
[[냉전]]기간 동안,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동구권]]내에서 가장 개인 숭배를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개인 숭배 현상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을 많이 차용했다. 본디 차우셰스쿠 자신에게만 개인 숭배를 행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 그의 아내인 [[엘레나 차우셰스쿠]]도 1989년 정권이 붕괴되기 전에 숭배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