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상하이 사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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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Shanghai 1932 19th route.jpg|thumb|300px|방어진지에서 전투 중인 국민군 19로군]]
[[그림:Shanghai 1932 military police.jpg|thumb|300px|일본군과 교전하는 중국 헌병]]
'''상하이사변상하이 사변''' 또는 '''제1차 상하이사변상하이 사변'''은 1932년 1월 28일에 중국의 [[상하이]] [[조계지|국제 공동조계]] 주변에서 일어났던 중일[[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의 양군의군사적 충돌이다. 1937년에 일어난 제2차발발한 [[중일전쟁중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전초전 성격을 지닌 충돌이었다. 1월 28일에 일어난 사건이기사건이었기 때문에 중국은 일이팔사건이라고'일이팔 사건'이라고도 하고부르고, 서양에서는구미에서는 상하이 사변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이라고 한다.
 
==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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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
1월 26일에는 중국[[중화민국]] 당국이정부가 계엄령을 포고하고, 중국인 지구 전역에 [[모래주머니]]와 가시 철망으로 [[바리케이트]]를 구축하고, 외국인에게 조계 안으로 피난을 권고한다. 2일 후, 상하이시 의회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상하이 의용군 부대를 수비에 배치하였다. 공동 조계 방위 위원회는 여전히 사태에 위협을 느끼고, 홍커우 방위를 일본인 의용군 부대에 맡겼다.
 
1월 27일이 되자 일본군은 30척의 함정과 40기의 전투기를 동원하여 상하이 해안 근처에 7,000 정도의 부대를 집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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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오후 5시에 조계국은 마침내 계엄령을 선포하고, 서양열강의 군대가 각자의 담당 경비 구역에 도착했다. 당시의 일본의 병력은 1,000명이 넘었고, 9시 30분경 더욱 군함에서, 1,700명을 상륙하게 하여 합계 2,700명이 주둔하였다.
 
당시 상하이에는 국민당[[중화민국]] 정부의 [[채정해]]를 사령관으로 하는 약 33,000명의 [[19로군]] 병력이 있었다. 사태가 악화되자 19로군은 조계의 요소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황푸 강]] 유역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1월 28일 자정에 중국과[[중화민국]]과 [[일본 제국]] 양군이 북사천로에서 충돌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조계지 개정방위계획에 따라 일본군이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중국중화민국 정부에는 통보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중국의 주권지에 속했는데, 중국은 일본에 맞서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다. 일본군은 치열한 공격에도 불과하고, 개전 3일 만에 본국 증원군을 요청하게 되고 2월 1일 해군 사령부는 2개의 육군 부대를 증파하고, 제3함대를 편성하여 해군병력을 지원하였다.
 
다시 19로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히자, 일본은 [[일본 제국 육군 9사단]]을 주력으로 한 병력을 증파 16척의 수송선에 나누어 15, 16일 상하이 항과 오송부대에 상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