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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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
|이전 왕= [[대위해]]?
|다음 왕= [[대정현]]
|목록=[[발해의 역대 국왕|발해의 15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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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거란족]]은 [[7세기]] 전·후반에 당나라의 지배를 받았는데, 당나라의 거듭된 혼란을 틈타 독립을 선포했다. 그들은 추장 [[야율아보기]]를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발해 문덕 19년([[923년]]) 거란이 요양의 옛 성을 수리하고 [[발해]] 백성들을 붙잡아갔다. 문덕 20년([[924년]])에는 [[발해]]가 군사를 일으켜 요주(遼州)를 공격하였다. 공방전 끝에 요주자사 장수실이 전사하고, 발해군이 [[거란]] 백성들을 붙잡아 개선했다.
 
문덕 21년([[925년]]) 9월, 장군 신덕이 무리 500여 명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하였다.
 
같은 해 12월 을해일,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어전회의에서 "서쪽은 제거했으나 동쪽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였다. 곧 [[거란]]이 군사를 일으켜 [[발해]]를 침공한다. 12월 기유일, 거란군이 [[발해]]의 살갈산에 진출하였다. 같은 달 정사일에는 고령에 이르렀으며, 이 날 밤 [[부여부]]가 포위되었다.
 
문덕 22년([[926년]]) 정월 기미일, 하늘에서 흰 기운이 일어나 태양을 관통하였다. 흰색은 서쪽의 상징하는 색깔이다. [[고구려]]의 후예로 오랜 시간 [[만주]]를 통치한 발해를, 발해 서쪽에서 일어난 [[거란]]이 격파함을 암시하는 징조였다. 이듬해 1월 경신일, 마침내 부여성이 함락되었다. 부여성 성주가 분전 끝에 전사하였다. 처절한 공성전 와중에 [[야율아보기]]가 발해군이 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같은 날 거란군은 [[발해]] 동평부에 진출하였으며, 하루 만에 동평부가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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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정축일, 임금이 성문을 굳게 닫고 다시 응전 태세를 갖추었다. 하루 만에 [[거란]] 군대가 성첩을 넘어 황성을 함락시켰다. [[야율아보기]]가 말을 탄 채 황궁에 들어섰는데, 임금이 [[야율아보기]]의 말 앞에서 꿇어앉아 죄를 청했다. [[거란]]이 황족들을 포박하여 성 밖으로 끌고 나왔다.
 
2월 병오일, [[거란]]이 발해국을 동거란(東丹國,[[동란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황성의 이름을 천복성(天福城)으로 바꾸었다. 곧이어 [[거란]] 태자 야율배를 왕으로 봉하여 발해의 옛 땅을 통치하게 하였다. [[야율아보기]]는 임황(臨潢) 서쪽에 성을 쌓아 발해 최후의 임금 대인선을 유폐시켰다.
야율배를 왕으로 봉하여 발해의 옛 땅을 통치하게 하였다. [[야율아보기]]는 임황(臨潢) 서쪽에 성을 쌓아 발해 최후의 임금 대인선을 유폐시켰다.
대인선을 오로고, 황후에게는 아리지라고 불렀는데, 오로고와 아리지는 [[야율아보기]]와 그 왕비가 [[발해]]의 항복을 받을 때에 탔던 두 마리의 말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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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관계 ==
* 아들?: [[대광현]](大光顯)
* 형 :
** 조카: 대원양(大元讓)
** 조카: 대원겸(大元謙)
* 아들: 대소순(大昭順)
* 아들: 대광찬(大光贊)
* 아들: 대우모(大禹謨)
* 아들: [[대광현]](大光顯)
* 아들?: [[대정현]](大政賢)
 
==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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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전임자 = [[대위해]]?
|후임자 = [[대정현]]?(사실상)
|대수 = 15
|직책 = [[발해]] [[발해의 역대 국왕|국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