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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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고려의 역대 국왕|고려의 제32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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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禑王, [[1365년]] [[7월 25일]] ([[음력 7월 7일]]) ~ [[1389년]] [[12월 31일]] ([[음력 12월 14일]]))은 [[고려]] 제32대 [[군주|국왕]](재위: [[1374년]] ~ [[1388년]])이다. '''우왕'''(禑王)은 휘(諱)인 '''우'''(禑)에, 임금을 뜻하는 '''왕'''(王)을 붙여 부른 명칭으로, 시호는 받지 못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우왕'''이 [[신돈]](辛旽)의 아들이라며 "[[폐가입진|가짜를 내쫓고 진짜를 세운다(廢假立眞)]]"고 주장하여 신돈의 후손으로 기록되었으나 이는 모략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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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 오를 때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폐위 당할 때 그 이유 중 하나로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당대에 시호를 받지 못하였으며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는 우왕의 치세를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편목인 세가(世家)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烈傳)에 넣었다. 또한 성도 신돈을 따라 신우(辛禑)라 적고 있다. 우왕 및 창왕이 공민왕의 혈통인가 신돈의 혈통인가에 대한 진위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데, 다만 신돈의 혈통이라 기정사실화되고 역사에 기록된 것은 조선 건국 세력이 우·창왕을 폐위를 정당화하려는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9760&cid=1591&categoryId=15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왕 항목]</ref>
 
이때 그의 폐위와 우왕, 창왕 신씨설을 동조한 인물 중에는 [[정몽주]]도 있었다. [[정몽주]]는 [[1392년]]의 [[고려]] 멸망과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조선 태조|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우왕과 [[고려 창왕|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하는 데 가담하였다. 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과 처리 과정 등을 볼 때 다소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정몽주는 [[조선 태조|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고려 공양왕|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우면서 우왕과 [[고려 창왕|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손으로후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하였다.<ref name="naeill0126">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6페이지</ref> 우왕과 [[고려 창왕|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조선 태조|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신돈]]의 자손으로후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는데, 자신들이 이전에 인정하였던 왕들을 죽인 작업에 정몽주 역시 동의하였던 것이다.<ref name="naeill0126"/> [[정몽주]] 역시 [[우왕]]과 [[고려 창왕|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후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아니라는 반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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