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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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자 책봉 문제 ===
[[조선 태조|태조]]에겐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맞이한 두 명의 정처(正妻)가 있었는데, 한 명은 그가 무명 장수 시절에 고향에서 맞이한 [[신의왕후|한씨]]이며 다른 한 명은 군공으로 입신양면한입신양명한 그가 개경에서 맞이한 [[신덕왕후|강씨]]이다. [[조선 태조|태조]]는 고려조 왕비를 배출하는 최고 명문 가문이자 당대 제일 권문세가의 딸이었던 [[신덕왕후|강씨]]의 집안 배경 및 [[신덕왕후|강씨]]의 두터운 인맥과 지모의 도움으로 개국왕(開國王)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이에 [[조선 태조|태조]]는 왕으로 등극한 직후, 강씨를 왕비로 책봉하여 정비(正妃)로 삼았으며<ref>태조실록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8월 7일(병진) 1번째기사</ref> 그녀의 소생인 어린 두 왕자 중에서 왕세자를 간택하여 막내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한씨가 추존 왕비가 된 것은 그로 1년 후의 일로, 비록 한씨가 먼저 [[조선 태조|태조]]에게 출가하긴 하였으나 서열상 한씨는 차비(次妃)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조선 태조|태조]] 5년(1396년), 현비 강씨가 병으로 서거하자 [[조선 태조|태조]]는 강씨를 추모하기 위해 왕후(王后)로 추봉하는데, 이로 인해 한씨는 후궁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더이상 분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신의왕후|절비 한씨]] 소생으로 1남 방우, 2남 방과, 3남 방의, 4남 방간, 5남 방원, 6남 방연이 있었는데, 특히 5남 이방원은 부왕(父王)의 창업을 도와 공로가 크고 또한 자질(資質)이 영매(英邁)한 인물이라 부왕의 처우에 대한 불평이 대단하였다. 또한 개국공신으로서 왕세자 이방석의 보도(輔導)를 책임지고 있는 [[정도전]] 이하 [[남은]]·[[심효생]] 등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대단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