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아녜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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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시의 아버지인 피에트로 아녜시({{llang|it|Pietro Agnesi}})는 부유한 사람이었으며 볼로냐 대학의 수학교수였다.<ref>[http://en.wikisource.org/wiki/Catholic_Encyclopedia_%281913%29/Maria_Gaetana_Agnesi Catholic Encyclopedia (1913)/Maria Gaetana Agnesi - Wikisource]</ref><ref>[http://www.agnesscott.edu/Lriddle/WOMEN/agnesi.htm Maria Gaetana Agnesi<!--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press.princeton.edu/books/maor/sidebar_f.pdf</ref>
 
아녜시는 [[밀라노]]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였다. 다섯 살 때부터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할 수 있었고, 열한 살이 된 해에는 그리스어, 히브라이히브리어, 스페인어, 독일어, 라틴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그녀의 어린 동생들을 가르쳤다. 그녀는 아홉 살 때 여성의 교육 받을 권리에 관련된 주제로 한 시간 분량의 연설문을 라틴어로 작성하여 학회 모임에 제출하였다. 열다섯 살 때에는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초대하던 지식인들의 사교 모임에서 과학 및 철학 토론에 참가해 주위의 감탄을 샀다. 1738년에는 그런 토론들을 바탕으로 한 논문집 《철학의 명제》를 출간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자녀의 특출한 재능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모임의 과시적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20세 무렵부터는 사교 모임에서 물러나 집안 살림과 종교 생활에 전념하였다.
 
1748년 수학 교재 《이탈리아 청년들을 위한 미분적분학》({{llang|it|Instituzioni analitiche ad uso della gioventù italiana}})을 출판하였다. 1750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아녜시의 업적을 인정하여 그녀를 [[볼로냐 대학교]]의 수학 교수로 초대했다. 그러나 아녜시는 볼로냐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지 않았다. 1752년 부친상을 맞은 뒤, 아녜시는 더이상 학문적 연구를 하지 않고 여생을 봉사하며 보냈다. 그녀는 21명의 동생(그의 아버지는 3번 결혼했다)을 돌보고 교육하였으며, 교회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다. 아녜시는 1799년 81세의 나이로 밀라노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