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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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사후, [[강유]], [[비의]]와 함께 군사를 물렸다. 이때 사마선왕 곧 [[사마의]]가 추격하였는데<ref>《삼국지》〈제갈량전〉</ref>, 강유가 양의로 하여금 기를 되돌리고 북을 쳐 사마의 쪽으로 향하려 하여, 사마의가 더 쫓지 못하고 물러섰다고 한다. 위연은 양의의 지휘를 받기를 거부하고 잔도를 끊어 양의 등이 퇴각하는 것을 방해하여, 마침내 위연과 양의는 서로 표를 올려 상대방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주장하고 싸웠다. 위연의 병사들이 위연에게 잘못이 있다 하였으므로 위연의 군대는 무너지고, 위연은 사로잡혀 목이 잘렸다. 위연이 사망하자 양의는 위연의 일족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위연과 같은 죄를 씌워 죽이고 매우 재미있어했다.
 
위연을 주살한 후, 양의는 성도로 돌아와 중군사가 되었으나 일이 없으므로 한가하게 지냈다. 양의는 퇴각에 성공했고 위연을 주살하였으므로 자신의 공이 크다고 여겨 마땅히 제갈량의 뒤를 이어야 한다고 여겼으나, 제갈량은 양의의 성격이 좁으므로 [[장완]]을 후계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때 장완은 아직 대장군에 임명되지는 않았고(양의가 쫓겨난 후에야 임명), 다만 상서령·익주자사가 되었는데, 양의는 자기 혼자서만 장완보다 나이나 경력이나 재능이나 모두 월등하다고 여겼으므로 원망하여 탄식하는 소리를 일삼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양의의 말에절제가 없음을 두려워했고 감히 양의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다만 비의가 양의를 위로하였는데, 양의는 비의에게 원망을 토로하며 '''위에하지 투항하였으면말아야 차라리 나았으리라'''는 말까지 하였다하고 말았다.

{{인용문2|위나라로 귀순했더라면 이런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기회가 되면 언제라도 위나라로 가겠다.}}

비의는 은밀히 이 말을 상주했다. 양의의 이 말 한마디가 온 촉한을 뒤집어놓았다. 건흥 13년(235년) 정월, 양의는 파직되어 서민이 되었고, 한가군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양의는 비방하는 말을 하여, 마침내 군에 하명하여 양의를 사로잡으라고 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자결했다.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