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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헌종 14년) [[문과]]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의 종류|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48년]] [[경연관]](經筵官), [[1852년]](철종 3) 북병영(北兵營) 북평사 등을 지냈다. [[1858년]] [[경상좌도]]암행 어사로 파견되어 [[경상도]]를 순시하던 중, 전 [[양산시|양산]][[군수]] [[이재문]] 등을 탄핵하였다. [[1859년]] [[홍문관]]응교가 되었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이 되자 [[승정원]][[승지]]로 발탁되었고, 이후 [[예조]][[참의]], [[이조 (행정기관)|이조]][[참의]], 좌부승지, 우부승지 등을 지냈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에게 발탁되어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그러나 [[7월]] 대원군이 [[청나라]] 군에 의해 실각된 뒤 납치당하자 그는 그해 [[9월]],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에 보내는 자문을 썼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전라남도]] [[진도군]] [[금갑도]]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