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터 B. 피어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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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외교관,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족적을 남겼다. 국제분쟁 조정가 역할을 하며 활약한 것이 제일 크게 인정받고 있다. [[1951년]]에는 NATO의 의장으로, [[1952년]]에는 [[국제 연합 총회|UN 총회]]의 회장으로 뽑혔다. [[한국 전쟁]] 휴전 때도 유엔 고등판무관 역할을 했고 무엇보다 [[제2차 중동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수에즈 운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그 공로로 [[1957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정치가정치인 ==
피어슨은 [[1958년]] 당수프레지던트 경선에서 [[폴 마틴]]과 선거해서, 누르고정당의 당수에프레지던트가 당선되었다됐다. 그 후 [[1963년]] [[4월 22일]] 총선에서 제14대 캐나다 총리에 취임했다. 피어슨은 캐나다와 미국 정권, [[영국]]과의 관계를정권과 개선하는친해지는주력했으며신경써서 몰두하고, [[1964년]] 1월에는 캐나다 총리로는 처음으로 [[프랑스]]를 공식사무적으로 방문했다. 또 [[1965년]] 1월에는 미국-캐나다 자동차 협정을 체결했다했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 때, 미국으로부터미국 정부로부터 [[핵무기|원자력 탄두폭파 미사일]] 받는 데 동의하기도"동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는중반에 [[베트남미국 전쟁]]과정부가 베트남을 관련하여침략하자 [[린든 B. 존슨]] 정부와는행정부를 긴밀한비판하고, 관계를미국 유지하지행정부와 못하였고,입법부가 미국의베트남에 베트남군대를 파병보내라고 요청을요구하자 거절했다. 피어슨미국에 총리는갔을 방미 기간인 1965년 4월 2일 미국필라델피아에 필라델피아의있는 [[:en:Temple University|템플 대학교]]에서 미국의가르치면서, [[통킹 만]] 폭격을폭격하고 간접적으로북베트남(사회주의)에 비판하는처들어간 강연을미국 했다.행정부와 격분한입법부를 비판했다. 존슨 대통령은대통령이 다음날 피어슨 총리를 자기 별장인 대통령 전용 별장 [[캠프데이비드]]로 불러서불러내서 “남의 집 거실에 와서 오줌을 싸면 어떻게 하느냐(Don't you come into my living room and piss on my rug)”며”무례하게 고함치고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양복 깃을 움켜쥔 채 피어슨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고 한다했다.
 
또한 [[영어]] 사용자와 [[프랑스어]] 사용자들 사이의 논쟁들이 정세에 악영향으로 작용했다. 당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않았으며 인식이 있었고[불평등], 프랑스계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퀘벡 주]]에서는 분리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한편 경제는 호황 중이었기 때문에 피어슨 정부는 [[사회복지]]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피어슨은 [[1968년]] [[4월 21일]]에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세계은행 그룹]]의 총재가 되었다. [[1972년]] [[12월 27일]] [[오타와]]의 외곽 록클리프 파크(Rockcliff Park)에 있는 자택에서 [[암]]으로 사망하였다죽었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