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앙투안 레옹 드 생쥐스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전거 정보 틀 추가; 예쁘게 바꿈
어색한 문장 다듬기
24번째 줄:
== 생애 ==
=== 초기 활동 ===
생 쥐스트는생쥐스트는 [[1767년]], [[니에브르 주]] 데시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 장은 기사의 칭호를 가진 농민 출신의 경기병대 대위였고, 어머니 마리 안느 로비노는 데시즈의 공증인 레오나르 로비노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을 베르누이유 성직자였던 백부 앙투안 로비노와 함께 보낸 후, 1777년, 부모와 함께 피카르디 엔 주의 브레란크르로 이사를 갔다.
 
[[1785년]], [[수아송]]에 있는 오라토리오파 학원을 마치고, [[1788년]] [[랭스]]에 있는 로스쿨에 입학했다. 입학 후 1년을 거치지 않고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수료와 동시에 수아송 주의 검사서기시보로 발령받고, 바로 검사서기보가 되었다.
32번째 줄:
=== 혁명 활동 ===
==== 혁명 활동 초반 ====
[[1790년]]에는 23세의 나이에 국민위병대 대장이 되었고, 그해 [[7월 14일]] 연맹 축제에 참가한다. [[1791년]]에는 ‘혁명과 프랑스 헌법의 정신’을 발행하여 혁명 중 최연소 이론가이론가가 된다.
 
생 쥐스트는생쥐스트는 어설픈 자비 보다는 확실한 심판을 주장하였다. 그는 '혁명은 이제 자비롭고 애국적인 활동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회 건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했으며, 어설픈 타협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1791년]] 그는〈프랑스 혁명 정신과 헌법 정신 Esprit de la Révolution et de la Constitution de France〉이란 책을 발표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대담한 표현과 함께 생략법을 구사했다. 〈프랑스 혁명 정신과 헌법 정신 Esprit de la Révolution et de la Constitution de France〉에서 그는 입법의회에서 제정된 헌법은 첫 단계의 헌법으로는 받아들일 만한 내용이지만 아직도 기득권의 벽이 탄탄하여 프랑스 국민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국민은 주권자이며못하며, 지금 현재는 국민이 아직 주권자는주권자가 아니지만 국민주권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법률은 여론에는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되며 윤리에는 모든 것을 양보해야 한다"고 했다. 그 해의 [[국민공회]] 의원 선거에 그는 25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출마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실망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하며 왕당파, 사제 계급 등을 공격하는 논설과 칼럼을 발표했다.
 
==== 정치 활동 ====
그는 생애에서 수많은 명연설을 남겼고, 가장 유명한 것은 [[1792년]]에 [[8월 10일 사건]] 후 진행된 국왕 재판에서재판에서의 “처녀 연설”로 생 쥐스트는생쥐스트는 25세의 젊은 나이로나이에 [[국민 공회]] 의원으로 참여했다. "인민들은 신탁과 자신의 행복만을 갈구해왔다"며 그는 적극적인 혁명 활동의 동참을 요구했다. 한편 왕정을 복귀시키려는 왕당파 및 사제 계급, [[오스트리아]]와 연결하려는 귀족, 부르주아층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공격을 자처하였다. 또한 정부의 재정 및 경제 문제에도 관여하였고, [[오스트리아]]와 연결을 시도하는 왕당파들을 공격하면서 군사문제에까지 달려들었다.
 
그는 군 간부들과 병사들의 격차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는데 이 때문에 장군들 및 고급 장교들에게는 공포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지만 일반 사병이나 하급 간부들에게는 성자처럼 여겨졌다. 그는 하급 군간부와 병사들을 직접 위문하며 "진정한 행복은 불행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 무렵 그는 일반 병사들에게는 낭만적인 이미지를 쌓게 되었다. [[1792년]] [[9월]] 국민공회 의원에 당선되어 혁명 의회로 진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