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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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사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ref name="외로운 290">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991) 290페이지</ref> 학생회장인 [[김덕룡]](金德龍, 후일 국회의원)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ref name="외로운 290"/> 장택상은 한일회담 반대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을 찾아가 독려하였다.
 
[[1965년]] [[윤보선]], [[장준하]], [[박순천]] 등과 [[한일협상]] 반대운동을 추진했다. [[3월 30일]] [[국회의원]] [[김준연]]은 [[대한민국 국회|국회]]에서 정부가 한일협상을 하면서 [[일본]]으로부터 사전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ref name="그53">이병주 《그해 5월》 3 (이병주 지음, 한길사, 2006) 266페이지</ref> 정부에서 [[김준연]]을 구속하려 하자, 김준연은 '이 의혹은 장택상이 제보해주었다'고 발표하였다.<ref name="그53"/> 증인으로 출석한 장택상은 '1억 몇천만 달러를 받았다는 설이 있는데 진부를 알아보라.'고 발언하였다.<ref name="그53"/> 또한 그는 한일회담 반대 가두시위와 순회강연을 다녔다. [[박정희 정권]]은 [[윤보선]], 장택상, [[장준하]], [[유진오]], [[함석헌]] 등을 시위의 배후로 규정하고 사복경찰과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 직원을 보내 감시를 한층 강화했다.
 
==== 제3공화국 기간 중 야당지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