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암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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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월암동'''(月巖洞)은 글씨 쓴 사람은 미상이나, 그 필치로 보아 중국의 장필과 미불의 글씨가 유행하였던 조선 중·후기의 글씨로 추정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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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보고서 ==
경희궁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월암근린공원의 남서쪽 바위사면에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인왕산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누상동에 있는 백호정 터에는 “백호정(白虎亭)”이라 새겨진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현재 배화여자대학교 복지관과 북편의 주택가의 경계에 해당하며 글씨가 새겨진 바위는 바위옹벽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백호정은 활쏘기 연습을 위해 우대(上村) 일대에 지었던 민간 사정(射亭)인 우대 오사정(五射亭<ref>우대 오사정 : 등과정(登科亭), 등룡정(登龍亭), 운룡정(雲龍亭), 대송정(大松亭), 백호정(白虎亭)</ref>) 중의 하나로 이 사정들을 현재 모두 남아 있지 않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보면 1656년(효종 7)에 지명으로서 돈의문 밖에 월암(月巖)이라는 기록이 최초로 확인되고 있어 그 지명의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위글씨를 쓴 사람은 숙종 때 명필가인 만향재(晩香齋) 엄한붕(嚴漢朋)의 글씨로 전해진다. 엄한붕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이후 제일인자로 일컬어지는 명필로서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고, 쌍구전묵(雙鉤塡墨)에 능하였다고 한다. 필획이 옹골차고 결구가 치밀한 매우 뛰어난 글씨로 조선 중기 이후의 대자글씨에서 느낄 수 있는 기식을 가진 수작이며, 인왕산 다섯 활터 가운데 하나라는 역사적 유래가 있는 곳으로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도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진 「춘명일사(春明逸史)」편에서 월암에 대해 “....우리나라에도 월암이 있는데, 돈의문(敦義門) 밖의 서성(西城) 아래에 있는 바위로서 깜깜한 밤에도 오히려 밝은 빛이 나고 귀 기울여 들으면 은은히 파도 소리가 난다. 이로 인하여 ‘월암(月巖)’이라고 불렸다. 백사(白沙) 선생이 권상(權相 권율)의 집안에 장가들었는데, 그 집이 월암 아래에 있었고 지금까지도 서로 전해 오며 간가(間架)는 10여 칸에 불과하다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바위 아래에는 샘이 있어 지금도 약수터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 약수터에는 인왕산에 호랑이가 많던 시절에 병든 흰 호랑이가 수풀 속에서 물을 마신 후 곧 병이 나아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주민들이 그 자리에 가보니 조그마한 샘이 있어 이곳을 약수터로 이용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글씨 쓴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어 미상이나, 그 필치로 보아 중국의 장필과 미불의 글씨가 유행하였던 조선 중기 이후의 글씨로 추정되며, 결구가 치밀하고 풍격이 고고한 격이 있는 글씨로 조선시대 문집 및 고지도에서도 확인되는 역사적 명소이므로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