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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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
| 이름 = 헨리 8세
| 그림 = Henry-VIII-kingofengland 1491-1547.jpg
| 설명 = 헨리 8세 초상화
| 작위 = [[잉글랜드의 군주|잉글랜드 국왕]]
|재위 재위= [[1509년]] [[4월 21일]] ~ [[1547년]] [[1월 28일]]
| 대관식 = [[1509년]] [[6월 24일]]
| 전임자 = [[잉글랜드의 헨리 7세|헨리 7세]]
| 후임자 =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6세|에드워드 6세]]
| 배우자 = [[아라곤의 캐서린]],<br />[[앤 볼린]],<br />[[제인 시무어]],<br />[[클레페의 앤]],<br />[[캐서린 하워드]],<br />[[캐서린 파아]]
| 왕가 = [[튜더 왕가|튜더]]
| 부친 = [[잉글랜드의 헨리 7세]]
| 모친 = [[요크의 엘리자베스]]
| 자녀 = [[잉글랜드의 메리 1세|메리 1세]],<br />[[제1대 리치먼드와 서머셋의 공작 헨리 피츠로이|헨리 피츠로이]],<br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엘리자베스 1세]],<br />[[에드워드 6세]]
}}
'''헨리 8세'''({{lang|en|Henry VIII}}, [[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는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의 [[국왕]](재위 [[1509년]] [[4월 22일]]~[[1547년]] [[1월 28일]])이자 [[아일랜드 영지|아일랜드의 영주]](재위 [[1541년]]~[[1547년]])이며, 청년시절은 르네상스 군주로 알려졌으며 [[1509년]] [[4월 21일]]부터 사망할 때까지 아일랜드와 [[근대 초기의 프랑스|프랑스]]의 왕위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의 아버지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튜더 왕가]]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등극하였다
 
[[헨리 8세]]({{lang|en|Henry VIII}},[[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는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의 [[국왕]](재위:[[1509년]] [[4월 22일]] ~ [[1547년]] [[1월 28일]])이자 [[아일랜드 영지|아일랜드의 영주]](재위 [[1541년]]~[[1547년]])이며, 청년시절은 르네상스 군주로 알려졌으며 [[1509년]] [[4월 21일]]부터 사망할 때까지 아일랜드와 [[근대 초기의 프랑스|프랑스]]의 왕위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의 아버지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튜더 왕가]]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등극하였다.[[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형 [[아서 튜더]]가 요절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형의 미망인인 왕비 캐서린과 결혼하여 딸 [[메리 튜더]]를 두었지만 20년만에 양심의 가책을 이유로 이혼하였다. 캐서린 합스부르크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서 [[1520년]]대 초부터 자신의 정부였던, 왕비의 궁녀 출신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하였으나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 [[바티칸]]과 오래도록 갈등을 겪었다. 그 뒤 그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려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를 설립하였다. [[1536년]]과 [[1539년]]에는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소령(所領)과 재산을 몰수하였다.

두 명의 왕비를 처형하고 세 명의 왕비를 내쫓았으며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모어]] 등의 시종과 공신들을 처형하고 왕실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였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절대왕정]]을 확립하였다.

헨리 8세는 [[영국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치세 초반기에는 14세기 [[존 위클리프]] 이후 활력을 얻기 시작한 [[종교개혁]]을 강력히 억압하였지만,<ref name="cehen" /><ref name="William Tyndale">''See above, [[:en:Henry VIII of England#Martyrdom of William Tyndale|"Martyrdom of William Tyndale".]]</ref> [[로마 교황청]]과 대립한 왕으로 더 알려졌다. 이 싸움은 결국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6세기]] 이래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던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키고, [[로마 교황]] 대신 잉글랜드 국왕이 잉글랜드 교회의 우두머리로 자리 잡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비록 그가 임종하기까지 얼마간 [[영국 성공회]] 신자였다는 주장도 있고, 헨리 8세가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과 결혼하면서 [[로마 교황청]]에 의해 파문 당했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 동안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와 교리를 지지하였다.<ref name="cehen" /><ref>''See above, [[:en:Henry VIII of England#Second marriage|"Second marriage".]]</ref> 본격적인 잉글랜드 종교개혁 운동은 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였다. 또한 헨리 8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통합을 이끌기도 하였다. 대중문화에서 그는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며 여섯 번이나 결혼한 군주로 유명하다.
 
==생애==
=== 생애 초반===
====출생과 초기생애 초반 삶====
==== 출생과 초기 삶 (1491-1509) ====
헨리 8세는 [[런던]] 교외의 [[그리니치]]에 있던 [[프라센티아 궁전]]에서 [[헨리 7세]]와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헨리 8세가 태어날 때는 형 [[아서 튜더]]가 있었다.본래 헨리 8세에게는 여섯 명의 형제가 있었지만,그 가운데 겨우 세 명(아서 튜더([[웨일스 공]]),마거릿,메리)만이 유아기에서 살아남았다.1493년,아직 젖도 못 뗀 헨리 8세는 드바 성의 성주로 임명되었다.1494년에 [[요크 공]]이라는 작위를 받았고,그와 더불어 잉글랜드의 문장원 총재와 [[아일랜드]]의 총독으로 지명되었다. 헨리 8세는 우수한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라틴어]]와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았다. 당시 관례상 맏이였던 아서 튜더가 왕위를 물려받을 것으로 예정되었던 탓에 헨리 8세는 교회의 직분을 맡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아서 튜더]]가 1502년에 죽자 헨리 8세는 세자에 책봉되었다.헨리 8세는 어릴 때부터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으나 [[앤 불린]]과의 연애 문제와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 등으로 교황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독실한 가톡릭 교도였던 헨리 8세는 1521년 교황 [[레오 10세]]에게 한때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헨리 8세는 [[런던]] 교외의 [[그리니치]]에 있던 [[프라센티아 궁전]]에서 [[헨리 7세]]와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는 형 [[아서 튜더]]가 있었다. 본래 헨리에게는 여섯 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겨우 세 명 - 아서 ([[웨일스 공]]), 마거릿, 메리 -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남았다. 1493년, 아직 젖도 못 뗀 헨리는 드바 성의 성주로 임명되었다.
====왕세자 책봉====
 
그러나 1502년에 [[아서 튜더]]가 알려지지 않은 불치병(아마도 [[결핵]]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에 걸려 갑자기 죽었다.그리하여 혼인관계를 통하여 잉글랜드 왕국과 스페인 왕국 간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헨리 7세의 노력이 잠시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였다.죽은 아서 대신에 그의 동생 헨리 8세가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자가 되었다.부왕 [[헨리 7세]]는 즉시 [[로마 교황]]에게 새로운 웨일스 공과 그의 형제의 미망인,즉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막내딸인 [[아라곤의 캐서린]]의 결혼을 허용해줄 것이 요청되었다. 캐서린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딸이자 [[후아나 1세 (카스티야)후아나]]의 언니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이모였다. 부왕 헨리 7세는 스페인과 영국 양국 간의 명예와 동맹을 위해 정략 결혼을 감행했다.당시 캐서린은 아서 튜더와 결혼은 했으나 처녀성을 잃지는 않았다고 맹세하였다.결국,교황으로부터 관면을 받은 후 자신의 젊은 남편이 죽은 지 14개월 만에 캐서린은 새로운 웨일스 공이자 죽은 남편의 형제와 다시 약혼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러나 1505년까지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동맹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졌다.그리고 아직 젊었던 헨리는 자신의 약혼이 자신의 동의 없이 치러진다고 여겼다.
다음해 1494년에 그는 [[요크 공]]이라는 작위를 받았고, 그와 더불어 잉글랜드의 문장원 총재와 [[아일랜드]]의 총독으로 지명되었다. 헨리는 우수한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라틴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았다. 당시 관례상 맏이였던 아서 왕태자가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것으로 예정되었던 탓에 헨리는 교회의 직분을 맡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형 아서가 1502년에 죽자 헨리는 세자에 책봉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1509년 헨리 7세의 임종 때까지 늦추어지다가 그로부터 2개월 후인 6월 11일에서야 결혼하였다.그리고 1509년 6월 24일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헨리 8세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로부터 2일 후,헨리 8세는 선왕의 중신 가운데 평판이 좋지 않은 장관들인 [[리처드 엠프슨]]과 [[에드먼드 더들리]]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가장 죄질이 나쁜 반역죄로 고발되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럼에도,1510년에 왕명에 따라 처형되었다.이는 장차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헨리 8세의 주요한 책략이 된다. 이후 어린 시절 헨리의 개인교사였던 요크 대주교 [[토머스 울지]]가 헨리 8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다.
 
===치세 기간===
어려서부터 그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으나 훗날 [[앤 불린]]과의 연애 문제와 첫 왕비와의 이혼 문제 등으로 교황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독실한 신앙이기도 했던 그는 1521년 교황 [[레오 10세]]에게 한때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결혼 편력====
 
첫 왕비는 형수였다가 청상과부가 된 스페인의 공주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이다.아서 튜더가 사망하자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관계 때문에 헨리 8세를 큰며느리인 캐서린과 정략 결혼시켰던 것이다.그러나 헨리 8세는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을 사랑하게 되고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서 캐서린과 이혼하고자 했다.하지만 헨리 8세의 이혼 신청을 교황이 받아들이지 않자 가톨릭 교와 단절을 선언하고 [[성공회]]를 창시하게 된다.앤 불린은 메리 1세에게 쌀쌀맞게 대하였다.캐서린이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이혼하였지만 앤 불린이 딸을 낳고,아들을 유산하자 실증을 느낀 헨리는 앤 불린에게 불륜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사형에 처하였다.앤 불린이 처형된 후 세 번째 왕비로 제인 시무어(Jane Seymour)를 맞이하였다.제인 시무어는 왕비가 된 후 에드워드 6세를 출산하였으나,에드워드 6세를 낳을 때 얻은 산욕열로 죽고 만다.이후 헨리 8세는 도이칠란트와의 친선을 위해 도이칠란트 출신인 클레페의 앤(Anne of Cleves) 공주를 왕비로 맞았지만 금방 이혼을 하고 대신 왕의 착한 누이라는 칭호와 함께 영지를 주어 그곳으로 나가 살게 했다.그 뒤 바로 클레페의 앤의 시녀이자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의 사촌이기도 했던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를 맞아들였다.그러나 캐서린 하워드는 근위대장이자 시종인 켈페퍼와 외도를 하였고,결혼 전에도 여러 남자와 연애와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화가 난 헨리 8세는 캐서린 하워드를 참형에 처하고 만다.헨리 8세는 두 딸의 가정교사이자 과부였던 캐서린 파와 결혼한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왕세자 책봉 ====
그러나 1502년에 아서가 알려지지 않은 불치병(아마도 [[결핵]]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에 걸려 갑자기 죽었다. 그리하여 혼인관계를 통하여 잉글랜드 왕국과 스페인 왕국 간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헨리 7세의 노력이 잠시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였다. 죽은 아서 대신에 그의 동생 헨리가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1502년에 [[아서 튜더]]가 알려지지 않은 불치병(아마도 [[결핵]]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에 걸려 갑자기 죽었다.그리하여 혼인관계를 통하여 잉글랜드 왕국과 스페인 왕국 간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헨리 7세의 노력이 잠시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였다.죽은 아서 대신에 그의 동생 헨리 8세가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자가 되었다.부왕 [[헨리 7세]]는 즉시 [[로마 교황]]에게 새로운 웨일스 공과 그의 형제의 미망인, 즉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막내딸인 [[아라곤의 캐서린]]의 결혼을 허용해줄 것이 요청되었다. 캐서린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딸이자 [[후아나 1세 (카스티야)후아나]]의 언니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이모였다. 부왕 헨리 7세는 스페인과 영국 양국 간의 명예와 동맹을 위해 정략 결혼을 감행했다. 당시 캐서린은 아서 튜더와왕태자와 결혼은 했으나 처녀성을 잃지는 않았다고 맹세하였다.결국,교황으로부터 관면을 받은 후 자신의 젊은 남편이 죽은 지 14개월 만에 캐서린은 새로운 웨일스 공이자 죽은 남편의 형제와 다시 약혼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러나 1505년까지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동맹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졌다.그리고 아직 젊었던 헨리는 자신의 약혼이 자신의 동의 없이 치러진다고 여겼다.
 
결국, 교황으로부터 관면을 받은 후 자신의 젊은 남편이 죽은 지 14개월 만에 캐서린은 새로운 웨일스 공이자 죽은 남편의 형제와 다시 약혼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1505년까지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동맹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졌다. 그리고 아직 젊었던 헨리는 자신의 약혼이 자신의 동의 없이 치러진다고 여겼다.
 
두 사람의 결혼은 1509년 헨리 7세의 임종 때까지 늦추어지다가 그로부터 2개월 후인 6월 11일에서야 결혼하였다. 그리고 1509년 6월 24일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헨리 8세의헨리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로부터 2일 후, 헨리 8세는 선왕의 중신 가운데 평판이 좋지 않은 장관들인 [[리처드 엠프슨]]과 [[에드먼드 더들리]]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가장 죄질이 나쁜 반역죄로 고발되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럼에도, 1510년에 왕명에 따라 처형되었다. 이는 장차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헨리 8세의 주요한 책략이 된다. 이후 어린 시절 헨리의 개인교사였던 요크 대주교 [[토머스 울지]]가 헨리 8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다.
 
=== 치세 기간 ===
==== 결혼 편력 ====
첫 왕비는 형수였다가 청상과부가 된 스페인의 공주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이다. 형 아서가 사망하자 부왕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정치적인 관계때문에 아들 헨리 8세를 큰며느리인 캐서린과 강제로 정략 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첫째 왕비와 이혼하고자 했다. 하지만 헨리의 이혼 신청을 로마 교황이 받아들이지 않자 로마 교황청과 단절을 선언하고 [[성공회]]를 탄생시키게 된다.
 
헨리 8세와 앤 불린과 결혼에 성공하지만 앤은 전처 소생인 메리에게 쌀쌀맞게 대하였다. 그녀의 임신을 이유로 이혼하였지만 그녀가 딸 하나를 낳고, 후에 아들을 낳았지만 연속으로 사산하자 실증을 느낀 헨리는 앤 불린에게 불륜 외도의 누명을 씌워 사형에 처하였다. 앤이 처형된 지 얼마 후 세 번째 왕비로 제인 시무어(Jane Seymour)를 맞이하였다. 제인 시무어는 왕비가 된 후 왕자가 사망하였고 이어 왕자 에드워드 6세를 출산하였으나, 왕자 에드워드를 낳을 때 얻은 산욕열로 죽고 만다.
 
이후 헨리 8세는 도이칠란트와의 친선을 위해 도이칠란트 출신인 클레페의 앤(Anne of Cleves) 공주를 왕비로 맞았지만 금방 이혼을 하고 대신 왕의 착한 누이라는 칭호와 함께 영지를 주어 그곳으로 나가 살게 했다. 그 뒤 바로 클레페의 앤의 시녀이자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의 사촌이기도 했던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를 맞아들였다. 19세의 새 아내를 좋아했지만 그러나 왕비 캐서린 하워드는 근위대장이자 시종인 켈페퍼와 외도를 하였고, 결혼 전에도 여러 남자와의 연애, 성관계 사실이 확인되면서 화가 난 헨리는 캐서린 하워드도 참수형에 처하고 만다. 마지막에 그는 두 딸의 가정교사이자 과부였던 캐서린 파와 결혼한다.
 
====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1509-1525) ====
[[파일:HenryVIII 1509.jpg|thumb|left|1509년 18살 때의 젊은 헨리 8세.]]
헨리 8세는 [[박식가|르네상스적 인간]]이었으며,헨리 8세의그의 궁정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학구적이며 예술적인 혁신의 중심지였다.헨리 8세는그는 뛰어난 음악가, 작가, 시인이었다.헨리 8세가그가 작곡한 것으로 여겨지는 악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합창곡 ''Pastime with Good Company과Company'' 또는 ''The Kynges Ballade이다Ballade''이다.헨리 8세는또한, 그는 욕심 많은 노름꾼이었으며 주사위 선수였다.헨리 8세는특히 그는 운동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무예와 [[마상 창시합|마상 경기]], [[수렵|사냥]], [[테니스]] 실력이 뛰어났다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독실한 가톡릭 교도로[[천주교인]]으로 신앙심이 투철했다투철하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마르틴 루터]]를 비판한 《칠성사의 옹호》를 저술한 공로로 [[교황 레오 10세]]의 칭찬을 받아 신앙의‘신앙의 옹호자(''Defender of Faith'')라는’라는 칭호를 받았다받았을 정도였다.신앙의 옹호자는덧붙여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는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헨리 8세와 헨리 8세의 후계자들에게 대대로 물려받아 현재 영국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의 칭호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다.

1511년 [[교황 율리오 2세]]가 [[프랑스]]에 반대하는 [[캉브레 동맹|신성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새로운 동맹에는 수많은 나라가 신속히 참가하였는데,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까지 포함되었다.헨리 8세가헨리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진짜 이유는 프랑스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었다.헨리 8세는그는 1511년 11월에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를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었으며 [[캉브레 동맹 전쟁]]에 말려들 경우를 대비하였다. 1513년, 헨리 8세는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잉글랜드군은 [[쥐느가트 전투 (1513)|스퍼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패배시켰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헨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루이의 요청을 받아들여 잉글랜드를 침공하였다.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군은 [[1513년]] [[9월 9일]]에 [[플로덴필드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당하였다. 이때 전사한 스코틀랜드 병사 가운데는 스코틀랜드의 왕도 포함되어 있었다.

1520년대 초 시녀였다가 가면무도회에서 본 [[앤 불린]]을 보고 그의 한 눈에 들게 되었다. 불린은앤은 바로 임신하였고 이는 불린의 임신은 헨리그로 8세가하여금 이혼을 결심하는 계기가계기를 된다마련한다.
 
==== 이혼 부탁과 거절 ====
헨리헨리는 8세는즉각 클레멘스 7세한테교황청에 사람을 보내서보내 이혼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헨리 8세는헨리는 여러번 [[바티칸]]에 구약성서의 형제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조항을 인용해 캐서린과의 결혼이 신의 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이 먹은 캐서린에게 실증이 났고, 자신의 아들을 낳아 준 적이 없으며 나이 40세가 넘은다 된 아내 캐서린에게 싫증났기싫증이 났기 때문이고, 폐경을 때문이다염두에 둔 고려의 결과였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아라곤의 캐서린의 조카이자 강력한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봐 부담스러워했다부담스러워했고, 바로 거절하였다. 불린의앤의 임신과 동시에 아들이리라는 기대와 함께 앤 불린과앤과 결혼하겠다는 마음이 굳어지면서점차 헨리굳어가면서 8세는헨리는 '왕의 중대사를중대사'를 달성할 수 있는 법적인 방도를 3년간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헨리 8세는헨리는 로마가 자신에게그에게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작정이라면,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와 분리하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헨리 8세는 1527년 5월에 캐서린과의 이혼을 선언하고 클레멘스 7세의 반대를 무릅쓰고 앤 불린과 결혼하였다.5월에 크랜머가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없었던 일이며 무효이고,성경을 근거로 해도 형제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으니 무효라고 선포했다.그해 5월 앤 불린은 대관식을 올리고 9월에 엘리자베스 1세를 낳았다.핸리 8세는 아들이길 바랐으나 딸이 태어나자 실망한다.그 후 앤은 아들을 유산한다.
====헨리 8세의 문제====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함과 더불어 헨리 8세의 조급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그러던 중 [[1525년]],헨리 8세는 캐서린의 시녀이자 자신의 애인이었던 메리 불린의 동생인 [[앤 불린]]에게 눈독을 들여 앤 불린에 대한 소유욕을 갖게 되었다.앤 불린은 메리 불린처럼 그늘의 왕비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자신을 유혹하려는 헨리 8세의 시도에 저항하였다.앤 불린의 거절을 받은 헨리 8세는 오히려 더욱 앤 불린에 끌리게 되면서 집요하게 앤 불린을 유혹하였다.헨리 8세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앤 불린은 계속 거절하였다.그러나 앤 불린이 헨리 8세에게 결혼을 무효화시키라는 제안을 했을 것이며,그것이 아들을 상속자로 삼고자 하는 헨리 8세의 소원에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라는 신빙성 있는 주장이 있다.헨리 8세의 아버지인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잉글랜드 왕국은 왕위를 놓고 내전을 겪은 전례가 있었다([[장미 전쟁]]).그러한 일을 잘 알던 헨리 8세는 왕위 계승을 탄탄히 하고 싶어했다.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는 [[잉글랜드의 메리 1세|메리]]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죽었기 때문에 아들이 없는 상태였다.
1527년 5월에 그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선언하고 교황의 반대를 무릅쓰고 앤과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5월에 대주교 크랜머가 그의 첫 번째 결혼은 없었던 일이며 법적으로 무효이고, 성경을 근거로 해도 형제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으니 무효라고 선포했다. 바로 그해 5월 앤은 왕비로 대관식을 올렸다. 9월에 헨리에게 딸 엘리자베스를 낳아 주었다. 아들임을 기대했으나 딸이 태어나자 그는 실망하게 된다. 그 뒤로도 앤은 다른 아들을 낳았지만 요절하고 만다.
 
==== 헨리의 중대한 문제 (1525-1533) ====
아라곤의 캐서린이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함과 더불어 헨리 8세의 조급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러던 중 [[1525년]], 헨리 8세는 당시 캐서린 왕비의 젊은 시녀이자 한때 자신의 애인이었던 메리 불린의 동생인 [[앤 불린]]에게 눈독을 들여 그녀에 대한 소유욕을 갖게 되었다.
 
앤 불린은 예전의 메리 불린처럼 그늘의 왕비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자신을 유혹하려는 그의 시도에 저항하였다. 그녀의 매몰찬 거절을 받은 헨리 8세는 오히려 더욱 그녀에 끌리게 되면서 집요하게 그녀를 유혹하였다. 이러한 헨리 8세의 계속된 유혹에도 앤 불린은 계속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헨리 8세에게 혼인을 무효화시키라는 제안을 했을 것이며, 그것이 아들을 상속자로 삼고자 하는 헨리 8세의 소원에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라는 신빙성 있는 주장이 있다.
 
과거 헨리 8세의 아버지인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잉글랜드 왕국은 왕위를 놓고 내전을 겪은 전례가 있었다([[장미 전쟁]]). 그러한 일을 잘 알던 헨리 8세는 왕위 계승을 탄탄히 하고 싶어했다.
 
그와 캐서린 사이에는 딸 [[잉글랜드의 메리 1세|메리]]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얼마 못 가 죽었기 때문에 아들이 없는 상태였다.
 
[[파일:Catherine aragon.jpg|thumb|left|180px|[[아라곤의 캐서린]],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
이러한 헨리의 사정을 파악한 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이 캐서린을 대신해 왕비로 등극하고자 하였다.<ref name="cehen">{{ws|"[[s:Catholic Encyclopedia (1913)/Henry VIII|Henry VIII]]" in the 1913 ''Catholic Encyclopedia''}}</ref> 얼마 후 그녀는 헨리 8세의 소망을 이용하여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ref>Brigden, p.114.</ref>
이러한 헨리宜세 사정을 파악한 앤 불린은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이 캐서린을 대신해 왕비로 등극하고자 하였다.<ref name="cehen">{{ws|"[[s:Catholic Encyclopedia (1913)/Henry VIII|Henry VIII]]" in the 1913 ''Catholic Encyclopedia''}}</ref> 얼마 후 그녀는 헨리 8세의 소망을 이용하여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ref>Brigden, p.114.</ref>헨리 8세는 [[토머스 울지]]로부터 독립하여 앤 불린과 관련된 자신의 계획을 토머스 울지에게 전하지도 않고 [[성좌 (가톨릭)|성좌]]에 호소하기로 하였다.헨리 8세의 비서인 윌리엄 나이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시켜 줄 것을 청원하고자 보내졌다.결혼이 무효라는 주장의 근거는 캐서린은 아서와의 이전 결혼에서 순결을 잃었으며, 따라서 헨리 8세는 형수와 결혼한 셈이 된 것이기 때문에 [[레위기]](20:21)에 어긋나는 비(非) 성경적인 결혼이며 율리오 2세 교황의 관면은 효력이 없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신명기(25:5)에는 이와 상반된 구절이 있다)또한,이혼을 할 경우에는 헨리 8세가 새로운 여성과 재혼해도 허락해 달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새로운 여성은 앤 불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당시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였기 때문에 나이트는 교황과 접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왕의 사절은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와야 했다.헨리 8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그러나 카를 5세의 압력을 받는 교황이 카를 5세의 이모인 캐서린의 결혼 무효를 거부할 것은 명백했다.교황은 로마에서 직접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헨리 8세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토머스 울지가 배신했을 거라고 확신한 앤 불린은 토머스 울지가 1529년에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헨리 8세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였다.1527년 헨리 8세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 이혼하려고 했으나 클레멘스 7세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이혼을 거부했다.당시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토머스 울지는 1515년부터 1527년까지 헨리 8세의 자문관을 겸하며 헨리 8세의 조력자로서 완벽하게 국정을 이끄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를 놓고 교황과 헨리 8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해임되었다.쫓겨난 토머스 울지는 앤 불린에게 자신의 정권 복귀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그러자 토머스 울지는 앤 불린을 국외로 추방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며 캐서린과 [[로마 교황청]]과의 연락을 취하였다.이 사실이 발각되자 헨리 8세는 토머스 울지의 체포를 명령했고 토머스 울지는 [[1530년]]에 붙잡혀 참형당했다.
 
토머스 울지를 대신해 대법관의 자리에 오른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새로운 정책에 협력하여 의회에서 토머스 울지를 탄핵하였고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불법이라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공포하였다.헨리 8세가 교황의 권위에 대해 반감을 품기 시작하면서 토머스 모어의 불안감은 커져 갔다.1년 후 법원의 판결에 따라 캐서린은 궁전에서 추방되었으며,캐서린의 방의 주인은 앤 불린이 되었다.예전의 토머스 울지처럼 앤 불린은 관리 임명 등 정치적인 문제에서 대단히 큰 영향력을 지녔다.앤 불린은 [[윌리엄 워햄]]이 죽은 후 공석이 된 [[캔터베리 대주교]]에 [[토머스 크랜머]]를 앉혔다.이 결정은 프랑스 왕의 도움을 받아 교황으로부터 인정받았다.토머스 크랜머는 클레멘스 7세로부터 [[팔리움]]을 하사받았다.새로 대법원장이 된 토머스 크롬웰은 1532년 영국 교회와 로마의 교회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1533년 헨리 8세와 앤 불린과의 재혼을 승락했다.날이 갈수록 잉글랜드 내에서 로마의 힘은 조금씩 약해져 갔다. [[1532년]], 새로운 대법원장이 되고 임시 대주교가 된 토머스 크롬웰은 헨리의 첫 번째 결혼이 무효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앤의 지지자였던 법률가 [[토머스 크롬웰]]은 일찍이 의회의 반대를 물리치고 비서장관과 주교 총대리의 지위를 제수받았다.토머스 모어가 대법관에 임명되자 헨리 8세는 토머스 모어를 장관의 우두머리의 지위까지 승진시켰다.이 일로 헨리 8세는 교황의 눈 밖에 났고,가톨릭 교와 결별하고 성공회를 창시하며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헨리 8세는 대리인 [[토머스 울지]] 추기경으로부터 독립하여 앤과 관련된 자신의 계획을 그에게 맨 처음 전하지도 않고 [[성좌 (가톨릭)|성좌]]에 호소하기로 하였다. 곧바로 왕의 비서인 윌리엄 나이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시켜 줄 것을 청원하고자 보내졌다.
====재혼====
 
1532년,헨리 8세는 칼레에서 프랑수아 1세와 회담했다.헨리 8세는 자신의 재혼에 대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지지와 협력을 얻기를 원했다.칼레에서의 회의는 프랑스 왕국이 헨리 8세의 재혼을 위해 지원해주었던 이래 정치적인 승리였다.즉시 잉글랜드의 [[도버]]로 돌아간 헨리 8세와 앤 불린은 재혼했고,왕실 관습에 따라서 [[1533년]] [[1월 25일]] 런던에서 다시 재혼했다.
혼인이 무효라는 주장의 근거는 캐서린은 아서와의 이전 결혼에서 순결을 잃었으며, 따라서 헨리 8세는 형수와 결혼한 셈이 된 것이기 때문에 [[레위기]](20:21)에 어긋나는 비(非) 성경적인 결혼이며 율리오 2세 교황의 관면은 효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명기(25:5)에는 이와 상반된 구절이 있다)
재혼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1533년]] [[5월 23일]],크랜머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혼인 합법성에 대한 결혼을 내리고자 [[던스터블 수도원]]에서 특별 법원을 소집하였다. 그곳에서 크랜머는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5일이 지난 [[1533년]] [[5월 28일]]에는 헨리와 앤의 결혼은 정당하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또한, 혼인이 무효 될 경우에는 헨리 8세가 새로운 여성과 새로 결혼식을 해도 허락해달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여성은 사실상 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였기 때문에 나이트는 교황과 접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왕의 사절은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와야 했다.
 
헨리 8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압력을 받는 교황이 카를 5세의 이모인 캐서린의 혼인 무효를 거부할 것은 명백했다. 교황은 로마에서 직접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헨리 8세가 새로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에 울지 추기경이 배신했을 거라고 확신한 앤 불린은 그가 1529년에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헨리 8세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였다.
 
1527년 헨리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 이혼을 하려고 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를 거부했다. 당시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울지는 1515년부터 1527년까지 영국 국왕의 자문관을 겸하며 헨리의 조력자로서 완벽하게 국정을 이끄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헨리의 이혼 문제를 놓고 교황청과 헨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해임되었다. 쫓겨난 울지는 앤에게 자신의 정권 복귀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고 그러자 울지는 앤을 국외 추방하려는 책략을 비밀리에 꾸몄으며 캐서린 왕비와 [[로마 교황청]]과의 연락을 취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헨리 8세는 울지의 체포를 명령하였으며, [[1530년]]에 결국 붙잡혀 참수당했다.
 
울지를 대신해 대법관의 자리에 오른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새로운 정책에 협력하여 의회에서 울지를 탄핵하였고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이 불법이라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공포하였다. 헨리 8세가 교황의 권위에 대해 반감을 품기 시작하면서 모어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1년 후 법원의 판결에 따라 캐서린 왕비는 궁전에서 추방되었으며, 그녀의 방의 새 주인은 앤이 되었다. 예전의 울지처럼 앤은 각료 임명 등 정치적 문제에서 대단히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앤은 [[윌리엄 워햄]]이 죽은 후 공석이 된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 자기 가족의 개인 예배당 사제인 [[토머스 크랜머]]를 앉혔다. 이 결정은 프랑스 왕의 도움을 받아 로마로부터 인정받았다. 토머스 크랜머는 클레멘스 7세로부터 [[팔리움]]을 하사받았다.
 
새로 대법원장이 된 토머스 크롬웰은 1532년 영국 교회와 로마의 교회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1533년 헨리와 앤 불린과의 결혼을 승락했다. 날이 갈수록 잉글랜드 내에서 로마의 힘은 조금씩 약해져 갔다. [[1532년]], 새로운 대법원장이 되고 임시 대주교가 된 토머스 크롬웰은 헨리의 첫 번째 결혼이 무효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앤의 지지자였던 법률가 [[토머스 크롬웰]]은 일찍이 의회의 반대를 물리치고 비서장관과 주교 총대리의 지위를 제수받았다. 이후 토머스 모어가 다시 대법관에 임명되자 대법관직을 사임함에 따라 헨리는 그를 장관들 우두머리의 지위에까지 올렸다. 이 일로 헨리는 결국 [[바티칸]]의 눈밖에 났고, 결국 로마와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며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 두 번째 결혼 ====
1532년 겨울, 헨리 8세는 칼레에서 프랑스 왕과 회담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결혼에 대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지지와 협력을 얻기를 원했다.
 
1532년,헨리 8세는 칼레에서 프랑수아 1세와 회담했다.헨리 8세는 자신의 재혼에 대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지지와 협력을 얻기를 원했다.칼레에서의 회의는 프랑스 왕국이 헨리 8세의 재혼을 위해 지원해주었던 이래 정치적인정치적 승리였다. 즉시 잉글랜드의 [[도버]]로 돌아간 헨리헨리와 8세와앤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앤은 불린은곧바로 재혼했고임신하였고, 왕실 관습에 따라서따라 [[1533년]] [[1월 25일]] 런던에서 다시 재혼했다한 번 결혼식을 올렸다.
 
재혼은행사는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1533년]] [[5월 23일]],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혼인 합법성에 대한 결혼을 내리고자 [[던스터블 수도원]]에서 특별 법원을 소집하였다. 그곳에서 크랜머는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5일이 지난 [[1533년]] [[5월 28일]]에는 헨리와 앤의 결혼은 정당하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1533년]] [[6월 1일]]에는 앤의 이름이 왕의 배우자 목록에 오름에 따라 캐서린의 왕비 칭호는 박탈되었다. [[1533년]] [[9월 7일]], 앤은 예상보다 일찍 출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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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운, 《세계를 뒤흔든 광기의 지도자들》 (도서출판 자음과 모음, 2005년)
* 박은봉, 《세계사 100 장면》 (도서출판 가람기획, 1998년)
 
== 바깥 고리 ==
{{Commons|Henry VIII of England}}
*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16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헨리 8세]
* [http://www.tudorhistory.net Tudorhistory.Net]
 
{{전임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