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동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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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삼청동문'''(三淸洞門)은 조선시대 문집 및 고지도에서도 확인되는 서울의 주요 경승지인 삼청동의 입구를 상징하는 지표이며, 중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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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보고서 ==
북악산 동쪽 기슭의 삼청동의 지명 유래는 조선시대 도교의[[도교]]의 삼청전(三淸殿<ref>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도교의 3위를 모신 곳으로 제사는 [[소격서]](소격서昭格署)에서 맡아보았다.</ref>)이 소재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도성의 북쪽 지구이자 경복궁의 동북지역으로 산이 맑고(山淸), 물도 맑으며(水淸) 그래서 사람의 인심 또한 맑고 좋다(人淸)하여 삼청이라 하였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삼청동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용재(傭齋) [[성현]](成俔)의 저서 『[[용재총화]](傭齋叢話)』에서 한양 도성 내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곳으로 북악의 삼청동이 제일이라 하였고, 정조는 『국도팔영(國都八詠)』 에서 ‘삼청녹음(三淸綠陰)’을 넣고 있어 이곳의 산수가 매우 아름다웠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득공의[[유득공]]의[[경도잡지]](京都雜志)』와 홍석모의[[홍석모]]의[[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삼청동의 수석을 찾아 시인‧묵객이 모였고, 장안의 부녀자들이 정초에 삼청동 뒷산까지 올라 숙정문에서[[숙정문]]에서 놀다 오는 것이 연례행사의 하나로, 즉 서울 장안의 부녀자들이 해마다 정월대보름 안에 그 해의 액운을 미리 막기 위한 액막이 치레로 삼청동 깊고 그윽한 골짜기를 거쳐 숙정문까지를 세 번 오르내렸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이 삼청동의 마을 입구에 병풍처럼 큰 바위가 서있으므로 병풍바위라고 했는데 이 바위에 “삼청동문(三淸洞門)”이라는 대자 네 글자와 그 옆에는 “임술사월각(壬戌四月刻)”이 새겨져 있다. 이 글씨를 쓴 사람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유본예의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조선 후기의 학자 이상겸(李尙謙)의 글씨라 하고 있으며, 성해응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이나, 오세창의[[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는 조선 후기 명필이었던 김경문(金敬文)의 글씨라고 하는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조선시대의 각종 문집 및 고지도에서도 확인되는 서울의 주요 경승지인 삼청동의 입구를 가리키는 의미가 있는 지표이며, 중국의 설암의 필법을 받아들인 [[한석봉]] 이후 현판 대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뛰어난 글씨로 문화재자료로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