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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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훼리호는 1993년 10월 10일 9시 40분경 360여 명의 승객과 화물 16톤을 적재하고 위도 파장금항을 떠나 부안 격포항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10시 10분쯤에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돌풍을 만났고, 회항하려고 뱃머리를 돌리던 도중에 파도를 맞아 심하게 흔들리면서 곧바로 전복, 침몰되었다.<ref name="동아_2">훼리號 침몰 過積·정원초과가 主犯, 《동아일보》, 1993.12.2</ref><ref name="동아_3">여객선 침몰 100여명 사망 실종, 《동아일보》, 1993.10.11</ref><ref name="경향_1">140여명 死亡·실종, 《경향신문》, 1993.10.11</ref><ref name="경향_2">선체 요동직후 삽시에 침몰, 《경향신문》, 1993.10.11</ref><ref name="경향_3">배가 기울어지면서 10초 정도의 시간에 침몰하였다고 보도되었다. ("구명조끼 걸칠 시간도 없었다", 《경향신문》, 1993.10.11 기사 참고)</ref> 생존자들은 2척의 구명정에 나누어 타고 부유물들에 매달렸다.<ref name="경향_3">선체 요동직후 삽시에 침몰, 《경향신문》, 1993.10.11</ref>
 
== 구조 및 수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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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 여건이 좋지 않은데도 무리하게 운항한 것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악천후였지만 예보 내용을 따른다면 규정상 출항이 가능한 여건이었고, 승무원들은 출항을 꺼렸으나 일부 승객들이 출항을 요구했다는 것이다.<ref name="동아_5">「強風속 무리한운항」禍 불렀다, 《동아일보》, 1993.10.11</ref>
 
구조 장비에 대해서는, 낚시용 아이스박스와 파카 잠바가 구조에 도움이 되었고, 그래서 [[연호 침몰 사고|연호]]나 [[남영호 침몰 사고|남영호]] 침몰 사고에 비해 생존자가 많았다는 주장이 있었다.<ref name="동아_6">1등 구조원 아이스박스, 《동아일보》, 1993.10.11</ref>
== 사회적 파장 외 ==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섬지역에서 살던 주민들이었다. 당시 여객선 회사에서는 승객을 너무 많이 태워서 시체가 무리지어서 발견되는 등 인명 피해가 심했기 때문에, 당시 [[신문]]에 죽음의 신이 여객선을 유혹하는 장면의 풍자만화가 실리기도 했다.
== 사고 처리 및 여파 ==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섬지역에서 살던 주민들이었다.
 
=== 사회적 파장 ===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섬지역에서 살던 주민들이었다. 당시 여객선 회사에서는 승객을 너무 많이 태워서 시체가 무리지어서 발견되는 등 인명 피해가 심했기 때문에, 당시 [[신문]]에 죽음의 신이 여객선을 유혹하는 장면의 풍자만화가 실리기도 했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