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3번째 줄: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후방인 [[대한민국 2보병사단|육군 제2사단장]]에 임명(1950년 6월 18일)되어 대전의 사단 본부로 부임(6월 20일)하였고 부대 순시를 마치기도 전에 전쟁 발발 소식을 접했다(6월 25일 8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백일 (1917년)|김백일]](金白一) 대령으로부터 “지금 적이 전면남침하고 있으니 병력을 끌고 빨리 올라와 달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56쪽. <!-- 먼저 제2사단의 경우를 보면, 사단장 이형근 준장이 이날 08.00에 대전에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백일(金白一) 대령으로부터 『지금 적이 전면남침하고 있으니 병력을 끌고 빨리 올라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 --></ref> <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6250020920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6-25&officeId=00020&pageNo=3&printNo=16533&publishType=00020 |제목=6ㆍ25를 회고한다-이형근 |출판사 =동아일보 |작성일자 =1975-6-25|인용문=<!--이 장군은 25일 오전 10시경 북괴가 침공했음을 알았다. 이준장은 6월 18일 전방사단인 8사단장에서 후방사단인 2사단장으로 전임발령, 20일 부임하여 5일만에 당한 일이었다. 2사단에는 5, 16, 25연대가 대전 온양 청주 천안 등에 분산배치되어 있었는데 아직 부대순시도 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은 것이다.--> }} </ref> 1950년 10월에는 육군 제3군단장, 1951년 8월에는 육군본부 교육총장을 맡았으며, 1951년 9월에 초대 휴전회담 대표로 참여하였고, 한국군이 북진을 계속하던 1952년 1월에는 육군 제1군단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그는 동부전선에 진출했다. 유명한 “351고지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휴전당시 동부휴전선을 38선에서 북쪽으로 훨씬 밀어 올려둔 것도 그의 공이 컸다. <ref>{{뉴스 인용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83100329207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8-31&officeId=00032&pageNo=7&printNo=5493&publishType=00020 |제목= 退役大將② 李亨根 |출판사=경향신문 |작성일자 = 1963-8-31 |인용문 = <!-- 국군이 북진을 계속하던 52년1월 제1군단장으로 승진하고서부터 동부전선에 진출했다. 유명한 「351고지」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휴전당시 동부휴전선을 38선에서 북쪽으로 훨씬 밀어 올려둔 것도 그의 공이 컸다.--> }}</ref> 진급을 거듭한 끝에, 종전 후인 1954년 2월 14일 [[정일권]] 장군과 동시에 사성(四星)장군이 되었다. 초대 대장인 [[백선엽]] 장군의 뒤를 이어 두 번째의 대장이 된 셈이다. <ref>{{뉴스 인용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83100329207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8-31&officeId=00032&pageNo=7&printNo=5493&publishType=00020 |제목= 退役大將② 李亨根 |출판사=경향신문 |작성일자 = 1963-8-31 |인용문 = <!-- 그후 진급을 거듭한 끝에 54년 2월 14일 정일권 장군과 동시에 사성(四星)장군이 되었다. 초대대장인 백선엽장군의 뒤를 이어 두 번째의 대장이 된 셈이다.--> }}</ref> 1954년 2월 초대 [[대한민국의 합동참모의장|합동참모총장]], 1956년 6월에는 제9대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가 스스로 물러났다.(1958년 5월)<ref>{{뉴스 인용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83100329207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8-31&officeId=00032&pageNo=7&printNo=5493&publishType=00020 |제목= 退役大將② 李亨根 |출판사=경향신문 |작성일자 = 1963-8-31 |인용문 = <!-- 그는 58년 5월 참모총장(9대) 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와 ....--> }}</ref> 1959년 8월 6일에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한 이래 재향군인회회장으로서제8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으로서 예비역 군인들을 지도해오다가 1961년 6월 주필리핀 특명전권대사를 거쳐 주영(駐英)대사를 지냈다.<ref>{{뉴스 인용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83100329207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8-31&officeId=00032&pageNo=7&printNo=5493&publishType=00020 |제목= 退役大將② 李亨根 |출판사=경향신문 |작성일자 = 1963-8-31 |인용문 = <!-- 예편한 이래 제8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으로서 예비역군인들을 지도해오다가 61년 6월 주비(駐比)특명전권대사를 거쳐 지금은 주영(駐英)대사로 있다.--> }}</ref>
 
그 밖에, [[미국]] [[육군]][[보병]]학교와 [[미국]] [[육군]]참모대학교도 졸업하였다. 그는 [[한국 전쟁]] 당시 10대 [[미스터리]]를 제기한 인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