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포스터 덜레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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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인물 정보
| 이름 = 존 포스터 덜레스<br />John Foster Dulles
| 그림 = JohnFosterDulles.jpeg
| 그림크기 = 280px
|크기= 200px
| 국가 = [[미국]]
|출생일= {{birth date|mf=yes|1888|2|25}}
| 직책 = 제52대 [[미국 국무부|국무 장관]]
|출생지= {{USA}} [[워싱턴 D.C.]]
| 전임 = [[딘 애치슨]]
|사망일= {{death date and age|mf=yes|1959|5|24|1888|2|25}}
| 후임 = 크리스탄 허터 (Christian Herter)
| 임기 = 1953년 1월 26일 ~ 1959년 4월 22일
| 대통령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 출생 = {{출생일|1888|2|25}}
| 출생지 = {{USA}} [[워싱턴 D.C.]]
|사망일= {{death사망일과 date and age|mf=yes나이|1959|5|24|1888|2|25}}
|사망지= {{USA}} [[워싱턴 D.C.]]
| 국적 = {{USA}}
| 정당 = [[미국 공화당|공화당]]
|대학 학력 = [[프린스턴 대학교]] A.B.<br />[[조지 워싱턴 대학교]] 로스쿨 LL.B.
|직업= [[변호사]], [[외교관]], [[정치가]]
| 별칭 =
|종교= [[장로교]]
| 유명 =
|서명=
| 직업 = [[변호사]], [[외교관]], [[정치가]]
|각주=
| 종교 = [[장로교]]
| 서명 = Staatsvertragsunterschriften John Foster Dulles.jpg
}}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년]] [[2월 25일]] ~ [[1959년]] [[5월 24일]])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미국의 외교 정책을 공식화한 [[외교관]], [[정치가]]이다. 52대 [[미국 국무부|국무 장관]](1953~1959)이다.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년]] [[2월 25일]] ~ [[1959년]] [[5월 24일]])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미국의 외교 정책을 공식화한 [[외교관]], [[정치가]]이다. 52대 [[미국 국무부|국무 장관]](1953~1959)이다.
 
== 생애 ==
=== 성장 ===
[[워싱턴 D.C.]]에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뉴욕]]의 공립학교를 다녔다.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지 워싱턴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뉴욕의 [[:en:Sullivan & Cromwell|설리번 & 크롬웰 법률사무소]]에 들어가 국제법 전문으로 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육군에 지원했지만 약시여서 입대할 수 없었다. 1944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토머스 E. 듀이와 친한 사이인 관계로 선거운동기간에 듀이의 외교 정책 고문을 맡았다. [[1946년]]과1946년과 [[1947년]], [[1950년]]에1950년에 [[국제연합]] 회의에 미국 대표로 출석했다. 보궐선거에 출마해 [[1949년]] [[7월 7일]] [[뉴욕 주]]의 [[미국 상원|상원]]으로 당선됐다. 임기는 1949년 11월8일까지였다. 1949년 선거에서 낙선했기 때문이다.
 
=== 국무장관 고문 시절 ===
[[1950년]] [[4월 19일]] [[트루먼]] 정권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 아래서 고문에 취임했다. 같은해 [[5월 18일]]에는18일에는 [[대일강화조약]]의 체결을 담당하는 대통령 특사로 임명됐다. 1950년 6월에 국무장관 고문으로서 한국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제2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19일)하고, <ref>{{뉴스 인용|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819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8-19&officeId=00032&pageNo=2&printNo=2977&publishType=00020|제목 = 光復十年의 발자취(19) : 六 · 二五事變|작성일자 = 1955-8-19|출판사 = 경향신문|인용문 = <!--制憲國會의 任期가 끝날 무렵 政府에서는 政界는 勿論이요 一般의 物議를 무릅쓰고 第二次總選擧實施를 遲延시키는 한편 赤字豫算의 編成을 試圖하였으나 當時 이를 反對하는 美國務長官「애치슨」氏의 覺書到達로 말미암아 政府에서는 從來의 主張을 變更하여 五 · 三十選擧를 實施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是非曲절 끝에 五 · 三十選擧가 實施되었고 1950년6월19일 열린 개원식에는 현미국무장관 「떨레스」씨가 참석하는 등 아세아의 민주보루로서 洋洋한 앞날이 약속되었던 것이다.--> }}</ref> [[38도선]]을 시찰(20일)했다. <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619002091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6-19&officeId=00020&pageNo=1&printNo=8300&publishType=00010 |출판사 = 동아일보 | 작성일자 = 1950-6-19 |제목 =덜레스氏 38線視察 |인용문 = <!--지난 十七日 來韓하여 同日下午五時에는 景武臺로 李大統領을 禮訪뒤이어 同夜에는 貞洞에 있는 “무치오”大使官邸에서 同大使晩餐會에 參席하는 等 繁多한 訪韓第一日의 日程을 마친 國務省顧問 “존{{.cw}}포스터{{.cw}}덜례스” 一行은 第二日인 十八日上午八時에는 政府側의 案內下에 東北”아시아”局長 “엘리슨”氏를 帶同하고 汽動車로 議政府를 거처 東豆川方面의 三八線接境을 視察하고 下午三時傾歸京하였다.-->}}</ref> [[1951년]] [[9월 8일]]에8일에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과 [[일본]]간에 체결된 평화 조약([[대일강화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의 공로자로서 국제적 칭찬을 얻었다. 또한 1950년과 1951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일본]]의 안보적 조약들을 협상하기도 하였다.
 
=== 국무장관 시절 ===
[[1953년]]부터1953년부터 [[1959년]] [[5월 24일]]에24일에 사망할 때까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에서 제52대 국무 장관을 지내면서, 강력한 [[공산주의]] 반대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영국의 총리를 지낸 [[앤소니 이든]]은 "덜레스가 정치세계의 선사(先師)였으나 때로는 자기 발언의 결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일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ref>{{뉴스 인용 |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13100209102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1-31&officeId=00020&pageNo=2&printNo=11622&publishType=00010 |제목= 써취라이트 |작성일자= 1960-1-31 |출판사= 동아일보}} </ref>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