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하드리아노 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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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선출==
교황 레오 10세가 선종한 후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레오 10세의 사촌인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훗날의 [[교황 클레멘스 7세]])이었다. 한동안 교착 상태가 지속되자, 스페인과 프랑스 추기경들이 합십하여 당시 사정상 콘클라베에 불참한 아드리안에게 표를 던지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1522년 1월 9일 아드리안이 거의 만장일치로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아드리안은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으나 수락하였다. 카를 5세는 자신의 개인 지도 교사였던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매우 기뻐했지만, 곧 아드리안이 장차 교황으로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통치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처음에는 아드리안이 카를 5세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라고 여겨 교회가 분열을 겪을 수도 있다고 위협하였다가, 나중에 마음이 누그러져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개인 지도 교사 및 섭정으로 지낸 이력 때문에 스페인판 아비뇽 유수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아드리안은 서둘러 이탈리아를 향해 길을 떠났다. 1522년 8월 29일 아드리안은 로마에 당도하였으며, 하드리아노 6세로서 그의 교황 대관식은 8월 31일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1908년판 가톨릭 백과사전에서는 하드리아노 6세가 즉위할 당시 그가 맞닥트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교황청은 이미 부패하여 고질적인 악습이 만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거부하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젊고 호전적인 성향의 제후들이 황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였으며, 소위 [[종교개혁]]이 발발하면서 독일 전역에 반란이 일어나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기독교 세계는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육지에서는 [[헝가리 왕국|헝가리]]의 [[베오그라드]]가, [[지중해]]에서는 [[로도스 섬]]이 오스만 군대의 위협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ref name="Pope Adrian VI">[https://en.wikisource.org/wiki/Catholic_Encyclopedia_(1913)/Pope_Adrian_VI "Pope Adrian VI". Catholic Encyclopedia.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1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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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노 6세는 대사 체계의 개선을 시도하는 등 당시 비평을 많이 받았던 [[대사 (가톨릭)|대사]]의 무분별한 남용을 해소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추기경들의 방해를 받게 되었다. 그는 또한 교황 레오 10세 시절인 수년 전부터 소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선금을 받고 혼인 장애(조당)의 해소가 불법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편,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로마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 사정에 대해 무지했던 하드리아노 6세는 자신이 교황으로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로마에 자신을 위한 숙소를 마련해 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교황==
하드리아노 6세는 과거에 [[스페인]]에서 일할 때도 말과 풍습이 달라 어려움이 많았는데 [[로마]]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파일:Santa maria dell'anima, tomba di adriano vi.JPG|thumb|200px|하드리아노 6세의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