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아테스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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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의 주화 때문에 신이라 불렸는데, 주화는 금가루로 광을 내어서 항해자들에게 이상적이였는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그 가치를 실제보다 높게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주화가 신 프라아틱스와프라아테스와 관련되는데 그 신은 메니아 안이나 근처의 지역 신이였다.
 
기원전 70년 프라아테스 3세가 왕좌에 올랐을 때, 로마 장군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의 왕 티그라네스 대제를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어는데, 그는 동아시의 최강자 였고 메소포타미아아와 여러 제후국을 파르티아로 부터 빼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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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Phraates III came to the throne in 70 BC, the Roman general Lucullus was preparing to attack Tigranes the Great, king of Armenia, who was supreme in western Asia and had wrested Mesopotamia and several vassal states from Parthia. Naturally, Phraates declined to assist Mithradates VI of Pontus and Tigranes against the Romans. Instead, he supported his son-in-law, the younger Tigranes, when he rebelled against his father, and invaded Armenia in 65 BC in alliance with Pompey, who abandoned Mesopotamia to the Parthians. But the desperate Pompey soon overrode the pompous treaty; he acknowledged the elder Tigranes, took his son prisoner, occupied the vassal states Gordyene and Osroene for the Romans, and denied the title of "king of kings," which Phraates had adopted again, to the Parthian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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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으로 프라아테스는 로마에 대항하는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 와 티그라네스를 도우는 것을 사절하였다.
기원전 57년경 프라아테스는 그의 두 아들 오로데스 2세와 미트리다테스 3세에 의해 살해되었다.
반면 그는 그의 양자인 더 젊은 티그라네스를 지원하였는데 그때 그는 그의 아버지에대해 반대하였고 폼페이와 연맹하여 기원전 65년 아르메니아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절망적인 폼페이는 곧 건방진 군단을 짓발고 티그라네스 대제에 감사하며 그의 아들을 체포하고 로마를 위하여 고르디에네와 오스로에네 제후국울 점령하였다. 그리고 왕중왕이라는 별칭을 거절하였는데 그것을 프라아테스가 다시 파르티아 왕에 채용하였다. 기원전 57년경 프라아테스는 그의 두 아들 오로데스 2세와 미트리다테스 3세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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