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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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이 [[신라]] 통일기 이래로 황폐해진 [[평양]]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 백성을 옮겨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처음에는 [[평양직할시|평양]] 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삼았다가 이어 "서경"으로 개편하였다. 서경은 그 후 줄곧 중요 시설과 기관이 설치되고 풍수(風水)·도참설(圖讖說)에 따라 역대 임금이 자주 행차했다.
 
[[왕치|성종]] 14년([[995년]])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 등 관원을 설치하고, 이후 문·무반 및 5부(五部)를 별도로 설치하여 [[개경]]과 대등한 제도와 지위를 갖추게 되었다. [[고려[[왕해 인종(왕자)|인종]] 때는 [[묘청]](妙淸) 등이 [[묘청의 난|서경 천도 운동]](西京遷都運動)을 일으켰고, 그 결과 서경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 뒤에 서경의 복구 문제가 대두하여 인종 16년([[1138년]]) 6조를 설치하고 영(令)·승(丞) 등을 두었다. [[고려 원종|원종]] 10년([[1269년]]) [[최탄]](崔坦),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을 일으켜 여러 성을 바치고 [[원나라]](元)에 항복하였다. 원은 이곳을 [[동녕부]](東寧府)로 삼았으나 [[충렬왕]] 16년([[1290년]]) [[고려]]에 다시 반환되어 서경이라 하였다. 그 후 [[공민왕]] 때 평양부(平壤府)로 개칭하였다. [[왕해왕구 (왕자)|왕해왕구]]
[[왕정 (왕자)|왕정]]
 
== 함께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