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제 화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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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소보융(蕭寶融)
|재위 =[[501년]] ~ [[502년]]
|대관식 =[[501년]], [[난징 시|건강]]강릉(建康江陵)
|별명 =자 : '''지소'''(智昭)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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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일 =[[502년]]
|사망지 =
|매장지 =공안릉(恭安陵)
|배우자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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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제 화제 소보융'''(南齊 和帝 蕭寶融, [[488년]] ~ [[502년]])은 [[중국]] 남조 [[남제]](南)의 제7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재위 : [[501년]] ~ [[502년]])이다. 자는 '''지소'''(智昭)이다.[[남제 명제(明帝) [[소란]](蕭鸞)둘째여덟째 아들로아들이고, 동혼후 [[소보권]]의 동복 동생이다. 사용한 연호는 '''중흥'''(中興)이다.
 
== 생애 ==
=== 초기 생애 ===
동혼후 소보권을 폐위를 시키기 위해서 [[소연 (양)|소연]](蕭衍)이 거병하여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 옹립되었고 동혼후 소보권이 살해되자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 실상은 소연이 실권을 장악하였고, 선양을 목적으로 즉위를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 해에 소연이 선양을 하였고, 남제가 멸망하였다. 소연이 제위에 올라 양나라(梁)가 건국되었다. 선양 후에는 소보융은 '''파릉왕'''(巴陵王)에 봉해졌고, 남제의 정삭(正朔)을 사용하게 허락이 되었지만, 그 다음달에 소연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남강왕(南康王), 서중랑장(西中郞將),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어 7주의 군사를 감독했다.
 
=== 황제 즉위 ===
[[500년]], [[양 무제|소연]](蕭衍)이 동혼후 소보권을 죽이는데 성공하자, 이어서 소보융에게 황제에 즉위하라고 권하였다. 소보융은 거절하다가 결국 이듬해인 [[501년]] 정월에 상국이 되었고, 3월에는 강릉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 제위 선양과 남제의 멸망 ===
그러나 화제는 [[502년]] [[3월]]에 소영주의 강압과 협박에 의해 소연에게 황제의 자리를 선양하고 말았다. 이로써 남제는 멸망하였다.
 
=== 멸망 이후 ===
소보융은 '''파릉왕'''(巴陵王)으로 강등되었고 고숙에 감금되었으나, 남제의 정삭(正朔, 달력)을 쓰는 것을 허락받았다.
 
=== 최후 ===
양 무제는 선양의 아름다운 이야기<ref>요가 순에게, 순이 우에게, 후한 헌제가 조비에게, 조환이 사마염에게 선양한 일</ref>를 듣고 그것을 본받아 자신도 그 주인공이 되고 싶어했고, 또한 자신이 제나라의 방계 황족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원래는 소보융을 죽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좌우에서 소보융을 처리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면서 제거하라고 부추겼고, 결국 [[4월]]에 양 무제는 심복인 정백금에게 금가루를 한 말이나 넣은 금설주(金屑酒, 금가루를 넣은 술)를 내려 소보융을 죽이게 했다. 정백금이 소보융에게 금설주를 마시라고 강요하였다. 그러자 소보융은 {{인용문2|"나를 죽이려면 금을 쓸 필요가 없다. 죽으면 가져가지도 못하는 금을 뭐하러 쓰는가? 그저 독한 술이면 충분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어서 정백금과 함께 독한 술을 연거푸 마시고 깊이 취하여 잠들고 말았다. 그러자 정백금이 비로소 소보융을 접살(摺殺)하였다.
 
이때 소보융은 15세였으며 황제의 예로 '''공안릉'''(恭安陵)에 안장되었다.
 
{{전임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