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기라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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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르]]의 황후 브르간은 옹기라트부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테무르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맞이했으나,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과 아난다를 살해하고, 몽골 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테무르의 조카 [[카이산]]을 황제로 맞이했다.
[[카이산]]이 죽자 카이산의 두 아들은 변방으로 좌천되었고 카이산파의 장교들은 숙청되었다. 카이산의 사후는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제위를 이었으나, 그의 치세는 대대로 옹기라트씨 출신의 황후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였던 옹기라트부 출신의 [[아유르바르와다]]의 어머니 [[다기 (원나라)|다기]] 카톤이 궁정내의 권력을 장악하여 칸의 명령보다도 모후의 명령이 더 권위를 가질 정도라고 이야기 되었다.
그 때문에 비교적 안정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가 1320년에 끝나고, 아유르바르와다의 뒤를 시데바라 계승했다. 그는 아유르바르와다 부얀투 칸과 옹기라트족의 라드나시리의 장남이었다.
[[시디발라]]의 강력한 조모 다기는 시디발라를 황태자로 임명하였고 다시 칸으로 설치하였다. 왜냐하며 그는 옹기라트 하툰의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제국은 거의 파산상태였다. 그러나 약간의 다기의 꼭두각시가 있었다. 그녀의 손자의 계승 직후에 다기는 테무데르를 비서실장으로 복위시켰다.
1322년
[[아유르바르와다]]가 죽은 뒤부터 1333년 [[토곤
겨우 제위가 안정된 것은 다수의 황족이 황위를 둘러싼 항쟁에 의해 쓰러진 끝에, 광서에서 추방생활을 보내던 토곤 테무르의 즉위에 의해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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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는 1353년에 황태자가 되었다. 그의 고려출신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이용하여 그녀는 황제가 황위를 아유르시리다르에게 건내게 압박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몽골은 고려를 병합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오빠 바얀 부하([[기철]])는 왕의 지위를 압박하고 바얀 테무르([[공민왕]])
1364년 기황후는 [[덕흥군 (고려)|타시
그 때에 황태자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내전이 있었고 반대하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는 결국 1364년 수도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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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르시리다르]]는 지지자인 [[코케테무르]](王保保)로 달아났지만 기 황후는 볼루드 테무르의 포로가 되었다. 볼루드 테무르는 다음 해 코케테무르에의해 전복되었다.
다시 그녀는 코케테무르의 지지로 그녀의 아들을 칸으로 즉위시키려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바얀
[[분류:몽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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