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발 (155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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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발대군 18700명이 탄 칠백여 척의 선박이 쓰시마를 출항 부산진 앞바다에 몰려왔다. 당시 [[부산진]]성에 있던 수군첨절제사 정발은 천여 명의 병력과 방어하고 있었다.
 
[[일본군]] 조총부대 상륙하여 부산진성 서문 앞에서 성안에 사격을 퍼부어 성벽을 수비하던 군사들을 사살하고 성으로 잠입했다. 1천 군사를 이끌고 성안에서 백병전을 전개하던 중 적이 쏜 총탄에 맞고 포로가 되었다가 살해되었다사망하였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부하들이 그에게 피난을 권고하자 그는 거절한다.
 
{{인용문2|남아가 세상에 나서 마땅히 전쟁터에서 죽을 뿐이지 구차하게 도망하여 목숨을 건지겠느냐.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9세였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홀로 끝까지 싸우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혔다. 동 [[4월 13일]] 포로로 사로잡힌 정발은 [[왜군]]에 의해 하루종일 목을 묶여두었다가 그날 저녁에 살해되었다.<ref>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7일(갑오) 2번째기사 "김경로·안세희를 인견하고 동래 전투, 각도의 민심과 적의 동향 등을 논의하다"</ref> 남은 군민들도 창칼이 부러지고 화살과 돌이 바닥날 때까지 선전 분투하였으나, 그 날을 넘기지 못하고 부산진성과 더불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때 그의 기생 첩 애향(愛香)은 여종 1명과 함께 절개를 지켜 스스로 자결하였고, 그의 충복인 용월(龍月) 역시 주인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9세였다.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으므로 일각에서는 그가 [[송상현]]과 함께 [[일본]]군에 투항하여 [[일본군]] 장수가 되었다는 루머가 퍼지기도 했다.<ref>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1월 25일(신사) 1번째기사 "유영길·김수를 인견하고 적병의 숫자, 영·호남의 전투 상황 등을 묻다"</ref>
그 뒤 그의 애마(愛馬)인 용상(龍嘗)이 투구와 갑옷을 생가까지 물고 달려왔다. 사후 시신을 찾지 못하여 투구와 갑옷으로 [[경기도]] [[연천군]] 마전면 백석리 새릉에 의관장(衣冠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연천군 마전과 적성현 일대에 정착하게 되었다. [[부산광역시]] [[동구 (부산광역시)|동구]] [[초량동]]의 [[초량역]] 근처에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산에 안장되었다. 임란이 끝나고 그의 생가가 있던 광동리 너븐골 근처에는 조정에서 내린 불천위(不遷位)의 은전으로 별묘(別廟)가 건립되고, 광동리 마을 입구에는 충신정려문이 세워졌으나 [[6ㆍ25 전쟁]] 무렵 모두 불에 소실되었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