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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수'''(具然壽, ? ~ [[1925년]] [[5월 6일]])는 [[을미사변]] 관련자이며 [[일제 강점기]]에 경찰 간부를 지낸 친일파 인물이다지냈다.
 
친일파로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큰 몫을 한 [[송병준]]의 사위이다.
 
그는 [[1895년]] [[을미사변]]에 연루된 인물로, 당시 살해된 [[명성황후]]의 시체에 석유를 뿌려서 불태우는 작업을 감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건후 그는 같은 을미사변 관련자들인 [[이두황]], [[우범선]] 등과 함께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했다. [[히로시마]], [[교토]]로 도망쳤다가 명성황후 시해 주범인 [[미우라 고로]] 등이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오자 [[도쿄]]로 이동하여 일본 정부의 비호 아래 망명 생활을 하였다.
 
[[1906년]]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듬해 [[대한제국 순종]]의 즉위로 특사가 단행되면서 명성황후 시해범들도 사면되었다. 귀국한 그는 통감부 경시, [[조선총독부]] 경무관, 경무국 칙임사무관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경찰 최고 직급인 경무관에 임명된 조선인은 구연수 외에 아직까지 알려진 인물이 없어, 일제의 강한 신임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ref>일제의 강한 신뢰를~: 강창일, 위의 글 중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대역죄인인 이들을 중용하게 된 것은 그 누구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ref>.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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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한국은행]] 초대 총재를 지낸 [[구용서]]이다.
 
== 같이 보기 ==
* [[을미사변]]
 
== 참고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