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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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소문이 중앙에 전해짐으로써 조정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조선 정조|정조]]는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노론 [[벽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어, 진산군수 [[신사원]]을 시켜 두 사람이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산군수는 윤지충의 집을 찾아 사당에서 위패를 넣어두는 주독을 발견하고 열어보았으나 위패는 없었다. 피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됐다는 소식에 1791년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가톨릭]] 신앙을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두 사람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 전라 감영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전라 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 관해 보고했으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임금은 처형을 윤허했다. 이로써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차례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신해박해]])<ref name="그림 1">{{뉴스 인용|제목=<nowiki>"[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1) 윤지충 "</nowiki> |url=http://web.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285653&path=200903|출판사=평화신문|저자=|작성일자=2009-03-08|확인일자=2009-04-16}}</ref> <ref>{{뉴스 인용|제목=<nowiki>"[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3) 권상연 야고보 "</nowiki>|url=http://web.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288585&path=200903|출판사=평화신문|저자=|작성일자=2009-03-29|확인일자=2009-04-18}}</ref> 당시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윤지충은 현재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한국 로마 가톨릭교회]]의 [[하느님의 종시복|복자]] 124위 중 첫 번째다.<ref name="그림 1"/>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