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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조선 개국 직후 태조로부터 예의좌랑직을 제수받았다. [[1408년]]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역모 사건을 취조하는 중에 [[조선 태종|태종]]에게는 보고도 하지 않고 태종의 부마이자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을 고문했다.<ref name="park74">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74페이지</ref> 이 사건으로 맹사성은 왕과 왕족을 능멸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되었으나 당시 [[영의정]]이던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ref name="park74"/>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생원시의 시관이 되어 권채 등 100인을 뽑았으며 왕이 친람한 문과복시에 득권관이 되었다. 그해 노부의 병환을 위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와 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417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고 [[1418년]] [[조선 세종|세종]] 즉위 후 [[공조판서]]가
세종이 가족을 잃고 불교에 귀의하자 [[성리학]]자이기도 한 그는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세종이 궐내에 내불당을 설치하고 태종 때 억울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준다고 하자, 그는 세종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번에는 [[집현전]] 학사들 일일이 찾아다니며 불교 귀의를 반대하였다.
그는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는 관대했으나 중요 직책의 사람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으며 {{모호|자식에 절하기로 술버릇 가르쳤다.}} 또한 [[김종서 (1383년)|김종서]]의 장수로서의 재질을 알아본 그는 김종서의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혼냈다. 그 뒤 김종서를 병조판서로 천거한 뒤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하기도 했다.
===예악의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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